‘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라는 이름은 생전 처음 들어봤다. 그의 저서는 국내에 네 권이 번역되어 나와있다. 에세이집인 《과거의 문턱》을 제외한 《칼리가리에서 히틀러로: 독일 영화의 심리학적 역사》, 《영화의 이론》, 《역사: 끝에서 두 번째 세계》, 이 세 권이 주요 저작인 것 같고, 그 중 《역사》는 유고집이다.
한때 영화 이론에 대한 선망이 있었으나 곧 실망, 그리고 외면을 거쳐 경멸까지 도달했었으나 지금에 와서 영화 이론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어진 건 왜일까 싶었다. 아주 잠깐 생각해보니 아마도 고전 영화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넷플릭스 같은 OTT들 덕에 영화를 보는 것보다 고르는 시간이 더 많은데, 신작들 중에 볼 것을 고르는 일은 아주 힘들어졌다. 그러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책도 고전을, 또는 최소한 몇 년에서 몇십 년의 시간을 견딘 책들을 읽는데, 영화는 왜 신작만 보려고 하지? 그러면 영화에도 책과 비슷한 기준을 적용해보기로 했다. (음악 소비에 관한 어떤 통계를 보니 그쪽 사정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신곡 청취 비율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를 읽기 시작한 것이 그 첫 시작이다. 그러나 영화 평(론)을 읽을 때 항상 답답하게 느꼈던 것은 대략 두 가지다. 첫째는, 평(론)하는 사람의 입각점이나 이론적 배경을 잘 모르겠다는 거다. 인상 비평일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둘째는, 이론이 있다한들 천편일률적인 교과서적인 비평일 경우다. 어쩌면 정치한 이론이나 숙고의 결과를 선호하는 내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서문밖에 읽지 않은) 크라카우어의 《영화의 이론》은 달랐다. 우선 대상 영화를 “사진에서 발전해 나온 일반적인 흑백영화”로 한정한다. 컬러는 “영화에 덜 본질적인 요소”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의 의도는 “실사영화의 내적 본성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이것을 찾을 수 있을까라는 기대가 생긴다.
크라카우어가 영화를 보는 관점 중 또 ‘충격적’이었던 것은 “영화는 본질적으로 사진의 연장”이라는 것이다(참고로 그의 생몰 연대는 1989~1966이다). 내 머리 속에서는, 사진으로부터 영화가 탄생하는, 그런 역사적 변천 과정이 있긴 했으나 이제 그 둘은 완전히 결별해 있었다. 아무리 영화가 사진들을 빠르게 이어 붙인 것이라고 한들, 그 본질은 여전히 사진에 있다? 이후 책의 내용이 또 기대되는 이유이다.
이렇게 어떤 학자나 작가에게 호감을 갖게 되면 그의 책들을 모두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요 저서들만큼은 읽고 싶은 욕심이 난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 당연한 결과로 《영화의 이론》을 완독하고 읽으려고 했던 《칼리가리에서 히틀러로》와 《역사》도 곧 집에 도착했다.
재밌게도 크라카우어의 한국어판들은 모두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그렇다보니 저자 소개 내용도 조금씩 다르다. 비교해보니 《역사》의 저자 소개가 가장 충실했고, 유고집이다보니 편집인이 서문을 썼고, 평소 깊은 학문적 교류가 있다보니 크라카우어에 관한 많은 내용이 들어있다.
그렇게 서문만 읽으려던 것이 본문까지 들어가 읽게 됐고, 내가 늘 의문으로, 불만으로 갖고 있던 생각을 들여다 본듯이 써내려 간 것을 확인했다. 이런! 영화에 관한 책인줄 알았는데. 저런! 더 좋네. 뭐 먼저 읽지.
또 재밌는 건 지금 뉴스레터로 보내고 있는 《악에서 벗어나기》와도 여러 연결고리가 있다는 거다. 그건 어쩌면 내 터널 시야 속에서 어떻게 시냅스 지들끼리 연락을 주고 받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할 수 없다. 그게 내 머릿속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를 때가 많다.
아래는 《역사》에 실린 저자 소개.
현대 사회와 문화, 일상생활, 영화, 역사를 폭넓게 연구한 독일 출신의 지식인.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철학교사이자 발터 벤야민의 편집자. 에른스트 블로흐와 레오 뢰벤탈의 친구였던 크라카우어는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이고, 문화비평가이자 영화이론가이며, 소설가이고 저널리스트이다. 188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건축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1920년까지 건축가로 활동했다. 제1차 세계대전 말, 당시 십대이던 아도르노와 가까워지며 함께 철학 강독을 했다. 1920년대 독일의 유력 일간지 《푸랑크푸르터 차이퉁》에서 영화와 문학 등을 소개하는 문예면 편집장으로 일하며 명성을 떨쳤다. 당대 일상생활을 탐구하던 크라카우어는 1920년대 초 《탐정소설Detektiv-Roman》을 발표하고, 이어 사진, 영화, 광고, 춤, 여행, 도시 등을 폭넓게 분석한 《대중의 장식Ornament der Masse》 (1927), 익명으로 발표한 자전적 소설 《긴스터Ginster》 (1928)를 출간했다. 소설가 요제프 로트는 소설 속 주인공 긴스터를 "문학의 채플린"이라 평했다. 1930년에는 새로 형성된 사무직 노동자 계급의 생활양식과 문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사무직 노동자Die Angestellten》를 펴냈다. 이 책을 접한 벤야민은 크라카우어를 자본주의의 흥을 깨는 '소란꾼'에 끼워넣었다.
크라카우어는 1933년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파리로 이주했고, 1941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영화 연구에 매진한 그는 1947년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독일 영화의 심리학적 역사From Caligari to Hitler: A Psychological History of the German Film》를 펴냈다. 바이마르공화국 시기의 영화에서 나치즘의 태동을 읽어내는 이 책은 현대 영화 비평의 기반을 닦은 명저로 평가된다. 1960년 크라카우어는 영화 연구의 기념비적 저서인 《영화 이론: 물리적 현실의 구원Theory of Film: The Redemption of Physical Reality》을 출간했다.
만년에 자신의 사상을 온축(蘊蓄)한 역사에 대한 책을 준비하던 크라카우어는 1966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완성 단계에 있던 그 유고를 묶은 마지막 책 《역사: 끝에서 두 번째 세계》가 1969년 출간되었다.
Share this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