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보내드리는 글은 〈노상기록〉 24호(2025.5.26)입니다.
이번에 읽고 쓴 책은 형식으로나 내용으로나, 책을 이렇게 만들 수도 있구나를 그대로 보여주는 책입니다.
〈노상기록〉 6월 멤버십 회원 모집을 시작했습니다. 많이많이 함께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주 금요일(5/30) 오후 10시에는 이번달에 다룬 책들을 총정리하는 유튜브 라이브를 제 체널에서 진행합니다. 구경하러 오세요.
《지속가능한 독립출판 모델을 향해》, 마크 피셔(지음), 김재경·노다예(옮김), 엔커, 2022
Marc Fischer, Towards A Self Sustaining Publishing Model (2021)
이 책은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중 가장 얇은 책1이지만, 진(zine)을 만들려는 계획2에 가장 많은 아이디어를 준 책이기도 하다. 내용은, 미국 "시카고에 기반을 둔 아티스트이자 출판인"인 마크 피셔3가 "스스로 깨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는, "10대 시절부터 30년 넘게 출판을 하면서 배운 것들을 공유"한, 독립출판 제작에 관한 것이다.
10분이라는 한정된 시간 동안 온라인 대담에서 말한 것을 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내용은 매우 간결하며 직접적이다. "집에서 인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라. 값싼 레이저 프린터나 잉크젯 프린터를 구입하고 중고 복사기를 찾아라", "이상적인 출판물 제작비는 판매가의 1/5 또는 1/6이어야 한다", "무료 인쇄는 좋은 인쇄다"와 같이, 바로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진 제작 계획을 세우며 가장 결정하기 어려웠던 것은 당연히 '어떤 내용으로 만들 것인가'였고, 그 다음은 형식과 수준이었다. 온라인에 글을 '올리는' 것과는 달리, '종이'이라는 물리적 형태를 추가하자 고려해야 할 변수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책의 크기, 페이지 수, 종이 종류와 두께, 제본 방식, 표지 종이, 인쇄 방식, 인쇄 업체, 집에서 프린터를 이용할 경우의 변수, 편집 디자인과 그에 사용할 앱, 글꼴, 사진, 발행 부수, 판매 방법, 발송 방법, 홍보 방법, 재고 보관, 제작비와 그 회수 방법 등등을 생각하다 보면, 이것들이 '내용'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살면서 봐 온 이런저런 책들 때문에 높아지기만 한, '책이라는 물건'에 대한 내 기준은 쉽게 낮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 이 정도는 되야지'가 몇 차례 반복되면 그 기준선은 오히려 점점 더 높아지기만 했고, 결국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수준에 다다르곤 하는 것이다.
의심과 불안이 만들어 내는 질문 — 이게 팔릴까? 아니, 그것보다도, 이걸 사람들이 좋아할까? 아니, 솔직히, 이걸 사람들이 좋아할 이유가 하나라도 있을까? 애초의 확신이 흔들거리는 이 과정을 수십 번 반복했다.
다행히도 피셔의 조언들은 '퍼블리싱'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줬다. 책이라는 모습을 잘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충동적으로 인쇄할 수 있는 능력은 좋은 결과물을 가져다 줄 가능성이 크다. 다양한 규모로 출판물을 계속 만드는 방법을 알아보라. (...) 방구석에서 인쇄 동아리를 시작하라. (1)
이 책에 실용적인 노하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피셔는 인생에서 출판이 차지하는 의미, 출판 공동체와의 바람직한 관계 만들기에 관해서도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출판은 인생의 한 여정이자 돈을 빨리 또는 많이 벌 수 있는 계획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협업의 경험을 즐기고, 다른 출판인들과 출판물을 교환하고, 소규모 출판사에서 출간된 찾기 힘든 아티스트북을 수집해 자기만의 멋진 아카이브를 구축하라.
(...)
출판으로 연결된 사람들을 가족으로 생각하라. 서점 사람들, 북페어와 진 페스티벌을 기획하는 사람들은 당신의 가족이다. 다른 출판사들, 출판인들은 당신의 가족이다. 오랫동안 계속해서 당신의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당신의 가족이다. (4-5)
최근 우리나라에도 진 커뮤니티와 독립출판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신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현상을 지켜보며 혼란스러웠던 것은 진이 독립출판물이긴 하지만 그 반대로 모든 독립출판물이 진이 좇는 가치를 지향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일반적인 독립출판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라는 문제까지 해명하고 납득하려고 시도해야 할까? 만약 그럴 경우에는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안다. '독립-'이 붙는 무엇을 고민하는 것은 항상 쉽지 않다.
이 고민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로까지 확장된다. 아날로그로 만들고 그걸 사용하는 것은 디지털보다 돈과 시간이 많이 든다. 반면 아날로그로는 시도도 해보지 못하는 것을 디지털로는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충동적으로" 해 볼 수 있는 것은 디지털 쪽이 용이함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 출판물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관성 때문일까 아니면 종이의 물성 때문일까. 당장 찾을 수 있는 해답은 아닐 것 같다.
〈노상기록〉을 시작하며 책 공동체, 지적 관계를 만들고 싶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아마도 공동체에 대한 내 오랜 고민과 피셔의 이 글이 뇌 어디쯤에서 합쳐지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오랫동안 계속해서 당신의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당신의 가족이다"라는 말은 가슴에 담아두고 싶다.
여덟 페이지이면서 한 장!
여전히 진행중...
《k-펑크》,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저자인 마크 피셔(Mark Fisher)와는 다른 마크 피셔(Marc Fisc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