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유튜브 채널에 “김대중 YWCA 초청 연설 '민족혼' (1980.3.26)”이 모두 올라온 후, 11개를 하나로 모은 영상이 올라왔습니다.
연설 녹취록을 구한 후에, 최대한 실제 연설과 같게 수정해서 지식정원에 올려놨습니다.
🎤 김대중 YWCA 초청 연설 '민족혼' (1980.3.26)
전체 영상 길이가 약 1시간 24분인데요, 몇 번째 듣는 것인데도 시간이 금방 가네요. 저 긴 걸 언제 다 듣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일단 한번 듣기 시작하면 그만두기 쉽지 않으실 거에요. 특히 당시 청중의 반응과 소란스러움도 함께 녹음되어 있기 때문에 현장의 열기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서울의 봄’은 재야인사 678명에 대한 사면·복권 조치가 내려진 1980년 2월 29일부터 시작되었죠. 이 YWCA 연설은 사면·복권 후 약 한 달 후에 이루어졌는데, 당시 앞뒤 상황을 《김대중 자서전》을 통해 확인해봤습니다.
사면·복권 직후 김대중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대국민 성명을 발표합니다.
보고 싶고 만나고 싶었던 국민 여러분을 7년에 걸친 쓰라린 단절 끝에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게 되니 솟아오르는 감격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지난해 10•26 사태 이후 적어도 두 가지의 국민적 총의가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봅니다. 하나는 국민 여러분이 그토록 열망해 온 민주주의의 수립이요, 다른 하나는 현 최규하 대통령 정부가 전 정권의 유산을 답습하는 변형된 유신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새로운 민주 정부의 탄생을 위해 과도기를 현명하게 관리하는 이름 그대로의 과도 정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 정부가 명분이 뚜렷하지 않은 비상계엄을 지속시키면서 언론을 아직도 제약하고, 모든 민주 인사의 완전 석방을 지연시키는 것은 확실히 국민을 초조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과 제가 가장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유신 체제의 주역들이 국민과 역사 앞에 자성하고 자숙하는 겸허한 태도를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과오를 범한 자들에게 보복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새로운 민주 정치에 참여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모든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자성과 시정의 뜻을 명백히 국민들 앞에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1
‘YWCA 연설’에 대해서는 이렇게 술회합니다.
3월 26일 저녁 7시, 나는 복권 후 처음으로 YWCA에서 "민족혼"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일반인을 상대로는 8년 만이었다. 청중들의 반응은 열화와 같았다."2
당시의 긴박한 정치 상황과 많은 대중 강연을 다닌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4월 14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이 다시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추가로 맡았다. 전 장군은 이로써 나라의 모든 정보기관을 장악했다. 나는 이러한 권한과 정보가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이 매우 우려스럽고 다시 민주주의에 위기가 닥칠지도 모르겠다고 재차 경고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여전히 낙관적이고 안이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국민과 함께, 국민의 힘으로 군부의 음모를 누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중 강연을 다녔다.3
이 시기에 이루어진 김대중 대통령의 대중 강연은 이렇습니다.
가톨릭 농민회 주최 강연(4월 11일)
한국신학대학 강연(4월 16일)
동국대학교 강연(4월 18일)
관훈클럽 초청 강연(4월 25일)
충남 예산 윤봉길 의사 의거 48주년 기념 강연(4월 29일)
정읍 동학제 강연(5월 11일)
최근 출간된 《김대중 육성 회고록》에서도 해당 시기에 대한 내용을 찾아봤어요.
— 1980년 3월과 4월에 한신대, 동국대, YWCA 등에서 강연을 하셨는데요, 이때 강연을 시작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그때 일관된 입장으로 민주주의가 위태롭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신민당은 낙관론에 빠져 있었고 언론은 내 입장을 제대로 다뤄주지 않았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검열에 의해서 언론이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겠지요. 그래서 내가 직접 국민들에게 알리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 반응은 어땠습니까?
"아주 열광적인 분위기였어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사고가 날 것이 걱정될 정도였습니다. "김대중을 청와대로! 김대중! 대통령!" 이렇게 외치는 사람도 많았어요."4
요즘 영화들을 통해서 ‘서울의 봄’ 전후 시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느꼈어요. 1980년이면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인데요, 돌이켜보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평온했던 때로만 기억하고 있네요. 그렇다면 어른이었던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은 그때 어땠을까 갑자기 궁금해지는군요.
현재 정치인들이 국민들과 밀접하게 소통할 수 있는 최적의 수단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대통령을 제외하면, 연설은 주로 선거 기간 동안에만 이루어지는 것 같구요. 그렇다면 평상 시에 활용할 수 있는, 연설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떠오르는 것은 있지만 더 생각해 봐야겠네요.
《김대중 자서전》 1권, p.393
위의 책, p.394
위의 책, p.395
《김대중 육성 회고록》, pp.371-372
현 시대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연설이네요. 기백이 느껴집니다. 수십 년 전인데도 불구하고 세계화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신기합니다.. 그때는 인터넷, 출산, 이민, 난민 문제가 불거지진 않았던 시기일 텐데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궁금해지는 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연설과는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지금은 정치인이 미디어에 출연할 기회가 많아서일까요? 김대중 대통령의 육성에 실리는 무게에 비하면 오늘날 정치인들의 연설은 왠지 맥없이 느껴집니다.
김대중 대통령 연설 잘 들었습니다! 처음 들었네요! 이 시대를 참으로 치열하게 사신 분이시네요! 더 선하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같은 것이 생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