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의 마지막 장(!) ‘10장: 초기낭만주의의 종교와 정치’를 정리해서 지식정원에 올려놨어. 이 장은 ‘8장: 낭만주의 형이상학의 역설’(#568)에서 다룬 피히테와 스피노자의 결합에 관한 내용이 일부 중복되기도 하는데, 전체적으로는 종교와 정치의 관점에 집중하고 있어.
독일낭만주의에 대한, 기존 영향력 있는 해석들은 “중세의 종교와 예술의 부활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본질적으로 반동적인 운동”이라든가 “낭만주의의 문제는 그것의 … 비정치성”이며 “근본적으로 미학적 운동”이라든가 하는 해석이었어.
그러나 저자는 1960년대 이후 출판된 낭만주의자들의 초기 철학적 단편들을 근거로 정치는 “낭만주의 철학의 긴밀한 요소”였다고 단언하고 있지. 초기낭만주의자들에게서는 정치가 예술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정치에 종속되는데, 예술의 목적이 문화, 인류의 교육이라고 주장했으며, 그것은 국가 안에서만 실현되기 때문이야.
종교의 경우에는, 최고선이 문화라고 주장했지만 이 또한 종교 없이는 획득할 수 없는데, 종교는 문화의 수단일 뿐 아니라 그것의 본질적인 부분이었고, 그것을 배후에서 이끄는 힘이라고 봤어. 낭만주의자들은 “휴머니즘적 종교 혹은 종교적 휴머니즘”을 원했다는 거야.
낭만주의의 종교는 매우 진보적, 자유주의적이었는데, 문제의 뿌리는 피히테적 휴머니즘과 스피노자적 종교를 어떻게 화해시킬 것이냐는 것이었어. 저자는 18세기 말경의 상황과 피히테의 급진적 자유 개념에 대해서 상술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지식정원의 요약이나 책을 참고하길 바래.
“그들은 최고선이 문화(Bildung), 인간의 탁월성 혹은 완전성, 모든 인간적 능력 전체의 자기-실현과 개발이라고 확고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주장했다.”
결국, 낭만주의적 종합은 스피노자를 재해석함으로써, 다시 말해 스피노자의 철학을 유기체적 세계관(생기론적 범신론 혹은 범신론적 생기론)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이루어졌어. 이 스피노자의 재해석을 통해 “이제 인간의 자기-의식이 자연의 목적이자 정점으로 회복되었으므로, 피히테는 결국 자아가 철학의 제일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거지(유기체적 세계관에서 정신은 “생명력의 조직화와 발전”의 가장 높은 정도이기 때문에).
그러나, 문제는 피히테가 스피노자주의에 반대했던 이유들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거야. 생기론적 범신론은 피히테의 급진적 자유 개념을 포함하지 못했어. “신은 그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행동하며, 모든 것은 단순히 신의 한 양태”이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통해 행동하는 신”이 되기 때문이지. 그래서 여전히 “정적주의1적 결과들”을 갖게 되고, 여기서 “낭만주의자들의 훗날 보수주의의 한 원천을 발견”할 수 있어.
그래서, 저자의 이 장 결론은 이거야.
궁극적으로 피히테와 스피노자의, 휴머니즘과 종교의 낭만주의적 종합은 문제적임
한때 낭만주의자들을 매료시켰던 특징인 피히테 철학의 급진주의와 행동주의는 포기되어야만 했음
종합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낭만주의자들의 생기론적 범신론은 철학사에서 휴머니즘과 종교의 고전적 딜레마를 넘어서려는 가장 창조적이고 흥미로운 시도들 중 하나로 보임
이렇게해서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 요약을 모두 마쳤네. 낭만주의에 대한 궁금증이 많이 해소됐고, 덤으로 관련 철학자들(칸트, 스피노자, 피히테 등)의 주요 개념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있어서 좋았어.
다음 정리할 책은, 후보가 몇 권 있는데 아직 결정 못 했어. 조만간 정해서 정리를 시작할 계획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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