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씨의 《리추얼의 종말》이라는 얇은 책(참고문헌, 주, 인터뷰, 역자 후기 등을 빼면 116페이지)을 다 읽었는데, 노트 정리할 것까지는 없어보여. 단상을 정리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네.
《리추얼의 종말: 삶의 정처 없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한병철(지음), 전대호(옮김), 김영사, 2021
한병철씨의 책들을 읽다보면 일종의 ‘선언문(manifesto)’ 같다는 느낌이 들어. 치밀한 논증보다는, 계속되는 단문으로 만들어진 특유한 문체로 단언들을 이어가지. 근거를 밝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어.
논증 전개 방식도 이번에 파악한 바로는 이러해.
과거의 좋은(긍정적인) 것이 있다.
그것이 나쁜(부정적인) 것으로 변화 또는 이행했다.
그 이유는 근대 또는 신자유주의 때문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많은 ‘이행’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도 ‘놀이’가 ‘노동(또는 생산)’으로 이행했다는 것이 큰 줄기야. 리추얼이 소멸해서 공동체가 해체된 것도 그 맥락이고. 등장하는 이행들 몇 가지만 보자면,
기표 → 기의
이야기 → 계산
신화 → 데이터주의
유혹 → 포르노
‘놀이’에 관한 논증을 하려면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를 피해갈 수 없었을텐데, 역시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어. 인상적인 한 구절만 인용하자면,
인간 행위들의 놀이 성격을 원시적 문화들에서 찾아내고 강조한 것은 아마도 호이징가의 공로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놀이를 절대화하느라 서양의 지식 전달 방식이 겪은 결정적 패러다임 전환, 곧 신화에서 진리로의 이행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그 이행은 놀이에서 노동으로의 이행과 겹친다. 사유는 노동을 향해 나아가면서 자신의 기원인 놀이로부터 점점 더 멀어진다. (p.104)
(읽어 본) 그의 많은 책들이 신자유주의 비판을 빼놓지 않고 있지. 그 비판은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현실의 문제를 냉정하게 알려주는 긍정적인 측면도 분명히 있어. 그러나 이전 글에서도 짧게 언급했듯이, 진단은 냉철하지만 처방으로는 넘어가지 못해.
자신의 역할이 정확한 진단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처방을 요구하는 것이 과하다고 할 수도 있어. 그러나 책을 다 읽고나서 ‘그래서 어쩌라는 것일까?’라는 물음이 뒤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네. 이 책의 부제가 “삶의 정처 없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극복 방법’은 알려주지 않고 있으니 말이야.
《서사의 위기》는 꽤 흥미롭게 읽었는데, 그보다 먼저 나온 이 책을 읽고나니 한병철씨의 책은 이제 그만 읽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신자유주의는, 시기적으로는 1980년대 이후, 즉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치면서 재분배를 추구하는 복지국가를 수립하고 노동조합의 협상력이 강화되었던 예외적 시기가 끝난 이후, 거시적으로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미시적으로는 각 개인의 사회적 재생산의 차원에서 아주 각별하고도 강력하게 관철된 생활양식의 주요 요인인데, 이 모든 차원에 걸친 현상과 대안을 궁리하려면 '사회지리학 개론'이 가장 좋은 책일 것입니다. ㅎ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3792433
잘 읽었습니다! 20년도 더 전에 징치학 공부할 때, 주류 신자유주의와 그에 저항하는 공동체주의에 대하여 따져보던 기억이 나네요! 공동체주의에는 따뜻한 느낌이 있지만, 명확성이 부족해서 손에 잘 잡히지 않았던 기억이 떠오르고요!
문득, 세상은 혁명적으로 변화하고 있는데, "아직도 신자유주의 타령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맞아! 변화무쌍한 세상처럼 보여도 그 본질은 그리스 아테네의 광장과 다르지 않아!"라는 생각도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