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가 ‘에세이’에 대해 갖고 있는 인상의 천박한 연쇄는 이러했다.1
에세이는 한국어로 ‘수필’ → 수필은 ‘붓 가는대로 쓰는 글’ → 정해진 형식 없이 자신의 생각을 써내려가면 된다 → 누구나 쓸 수 있다 → 그래서 아무나 쓴다 → 결국 글보다 글쓴이 덕에 읽힌다 → 에세이는 읽고 싶지 않다
이 고리가 끊어지기 시작한 건 김구용 선생의 《인연》을 읽기 시작한 후부터다. 그 이전에 접한 책으로 김수영 시인의 산문집도 떠올랐지만 그의 글에서 감동을 받진 못했으므로 깊은 인상은 남지 않았다. 국문학도로서 읽어야 할 책이라는 의무감으로 집어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시인의 탓은 아니다.
만사는 김구용 선생의 글을 읽으며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당연히도 선생의 ‘글솜씨’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람, 사물, 생활을 바라보는 선생의 태도와 깊이, “그저 생각의 앞면” 뿐이 아니라 “생각을 뒤집어 보고 그것의 앞면과 뒷면을 종합해 내는 것”2을 좇고 싶었다.
만사는, 굳이 ‘에세이’라는 표찰을 붙이지 않았을 뿐인 많은 글을 읽고 영향 받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해진 형식이 없으니 이것은 에세이고 저것은 아니다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내가 쓴 것은 에세이고 이것은 에세이집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자들을 의심스럽게 쳐다본다. 그들의 비장함에 비해 빈약한 어휘와 사고, 그리고 그 빈약함을 어미와 조사를 돌려쓰는 것만으로 포장하려는 모습은 애처롭다.
에세이에 대한 만사의 관심은 이 책을 읽게 만들었다.
《에세이즘》, 브라이언 딜런(지음), 김정아(옮김), 카라칼, 2023.
이 책에서 한 챕터만 읽어야 한다면 (그런 비상 상황이 있겠냐만은) 단연 ‘단상에 관하여’ (pp.112~122)다. 이 챕터를 향해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는 상상마저 했을 정도다. 에세이의 내용과 형식 모두에 관해 본질적 해석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데, (저자도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챕터이기도 하다. 만사는 반드시 기억해두고 싶은 욕심에 서울외계인의 👾지식정원을 빌려 이 챕터만 정리해놓았다.
“잘 쓴 글은 거미줄과 같아서 밀도가 높고 구심적이며 투명하고 자연스럽고 견고하다. 그런 거미줄은 모든 것을 끌어당긴다. 거미줄 사이로 황급히 빠져나가려던 은유는 영양가 높은 먹이가 된다. 글의 소재가 자처하여 날아들기도 한다.” (아도로느) (p.120)
이 챕터를 통해 발견한 책들은 이렇다.
필립 라쿠-라바르트 · 장-뤽 낭시, 《문학적 절대: 독일 낭만주의 문학 이론》 (2015)
프리드리히 슐레겔, 《아테네움 단상》이 포함돼 있음
테오도르 W.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 (2005)
아도르노의 가장 단상적인 저서로, 153개의 짧은 글로 구성돼 있음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제대로 전한다는 것은 곧 (아도르노 본인이 잘 알았던 바대로) 자신의 글이, 나 자신이 여러 모순되는 것들을 동시에 말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p.122)
만사는 이 책을 통해 ‘에세이’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좋은 에세이’를 쓰려면 어느 방향을 쳐다봐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 글은 〈만사씨 표류기〉 11월 15일자 뉴스레터입니다.
같은 책, p.121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쓰기 재주를 가진 자가 있고, 듣는 사람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는 언어의 마술사도 있고, 뭐든 잘 만드는 사람, 잘 하지는 못하지만 옆에 있으면 든든한 사람도 있다. 사람은 똑같은 점도 많지만 다른 점도 너무 많은데... 특정 기준으로만 사람의 가격을 매기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잘도 살아간다... 그나마 공정하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위로라도 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