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피콜라Speakola〉라는 웹사이트이자 뉴스레터이자 팟캐스트가 있어. 연설을 수집, 비평, 추천하는 곳이야.
🐭 연설이라고?
👾 그래. 연설. Speech. 수사학을 공부하면서 연설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한국 문화에서 연설은 주로 정치인들의 전유물처럼 되어 버렸지. 그런데 1980년대만 해도 웅변학원이 있었어. 학교 조회 시간에는 한 학생이 나와서 (주로 반공을 주제로) 웅변을 하는 시간이 있었지.
아, 근데 그게 연설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용과 전개는 매번 예상될만큼 뻔했고 그 부자연스러운 ‘웅변조’ 말투, 커다란 목청, 한 팔 그리고 한 팔을 차례로 하늘을 향해 뻗어 결국은 V자가 되는(이때 박수를 치면 된다) 과장된 몸동작만 기억에 남았으니 말이야.
🐭 그런 걸 학원에 가서 돈 내고 배웠다는 거야?
👾 내 기억으로는 웅변학원의 마케팅 포인트가 ‘내성적인 성격 개선과 발표력 향상’이었던 것 같아.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 발표력이든 목청이든 뭐라도 나아질 것 같긴 해. MBTI를 무시하긴 하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효과 하나는 인정하는데, 내향성을 가진 사람도 있고 외향성을 가진 사람도 있다는 걸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됐다는 거야. 이전까지는 내향성은 극복해야 할 성격상의 약점 같은 것으로 치부됐었으니까. 내가 잘 알지.😭
🐭 아까 한국에서는 연설이 주로 정치 영역에서만 사용되고 있다고 한 것 같은데, 다른 나라는 좀 다른가?
👾 아, 그래. 일단 아까 소개한 〈스피콜라〉는 호주 사람이 만들고 있는 거야. 서구권, 특히 영미권의 연설이 많고 그 외 지역의 연설들도 있어. 수집한 연설의 분류를 보면 정치 관련, 추모 연설, 학위 수여 & 졸업식, 결혼식, 생일, 영화 & TV, 토론 & 견해, 동기 부여, 스포츠, 예술 & 문화, CEO & 기업, 기타 등이야. 매우 다양하지.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모든 유형의 연설을 수집하고 있고, 현재 2천 개 이상을 모았다고 해. 대단하지?
🐭 저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연설을 한다고? 이쯤되면 내가 아는 연설이 이 연설이 맞는지 좀 헷갈린다. 뭐지?
👾 일단 연설의 사전적 정의를 보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1.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의 주의나 주장 또는 의견을 진술함.
2. 도리(道理), 교의(敎義), 의의(意義) 따위를 진술함.
이라고 나와있네? 모두 어떤 것을 ‘진술’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경찰 조서 쓰는 것도 아닌데) 진술을 하는 이유는 뭘까? 결국은 내 연설을 듣는 사람들이 자기의 주의, 주장, 의견, 도리, 교의, 의의 등등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기 위한 거 아니겠어? 쉽게 말해, ‘내 말대로 하면 좋으니까 한 번 해봅시다’ 같이.
그런데 개똥 같이 말해놓고 찰떡 같이 알아듣기를 바라면 되겠어? 알아듣더라도 행동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게 사람들을 설득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 그래서 “가능한 모든 설득 수단을 찾아내는 능력”1으로서 수사학(rhetoric)이 있는 것이고.
🐭 수사학이라… 사람들은 ‘레토릭’, ‘수사적 표현’이라는 말을 말장난을 한다, 속임수를 쓴다, 말로 뭔가를 숨기려고 한다는 말과 동일시하는 것 같던데? 수사학에 뭔가 좀 구린 구석이 있는 거 아니야?
👾 맞아. 그래서 수사학 관련 책의 서문을 보면 항상 그 부분을 짚고 넘어가더라. 그걸 보면 그런 오해는 한국에만 있는 건 아닌 거 같아. 남의 생각에 따라 움직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같은, 설득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같은 거 아닐까? ‘제다이 마인드 트릭’ 같은 게 아닌데 말이야.
〈스피콜라〉 소개하려다가 얘기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내 궁금증은 저렇게 한국에서 한국어로 된 연설을 수집할 수 있을까라는 거였어. 이런 연설문집도 있고, 역대 한국 대통령들의 연설을 모아놓은 책도 있긴 하더군. 그러나 역시 정치 영역이라는 한계가 있어.
한국은 왜 길이 남는 졸업식 축사 연설이나 추모 연설 같은 게 없을까?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고 또 보고 싶은, 훅 빨려드는 연설 장면은 없을까? 내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으니 추천할만한 연설이 있으면 댓글로 제보 부탁해.
🐭 연설에 익숙치 않은 문화인데 영화나 드라마에 갑자기 연설이 튀어나오면 어색해서 그런 거 아닐까? 아니면 학창시절 조회 시간에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이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
👾 그럴 수도 있고, 어쩌면 우리 사회에 ‘설득’이 끼어들 자리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 설득보다 대결을 통한 ‘승부’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여전히 ‘놀이’를 좋아해서일까.
연설은 아닌데, 계속 기억에 남는 내레이션 하나 소개할게. 영화 〈애드 아스트라Ad Astra〉에서 브래드 피트가 ‘심리 평가’를 하는 장면인데, 브래드 피트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됐어. 영화 중간중간에 나오는 독백도 참 좋아.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시학》, 25 (p.31) (천병희 옮김, 숲, 2017)
한국 영상물 중에서 기억에 남는 연설 장면은 생각이 나지않네요. 일드에서는 주인공의 설득으로 등장인물의 행동이 변화하는 장면은 빈번히 등장하는데요. 일드 입문 때 본 <야마시토 나데시코>에서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마츠시마 나나코가 수학에 재능이 있지만 생선가게를 하는 가난한 츠츠미 신이치가 친구 결혼식에서 행한 축사를 듣고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장면에 신기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영상에서든 일상에서든 본 적이 없는 상황이라 낯설면서도 신기했지요.
저는 올해 칸느에서 <괴물>로 각본상을 받은 사카모토 유지가 집필한 드라마 <그래도 살아간다> 5화에서 오다케 시노부의 10분을 훌쩍 넘는 독백 연기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중학생 남자아이가 초등학생 여아를 망치로 살해한 후 10년 후의 가해자와 피해자 두 집안을 다룬 드라마인데요. 살해당한 여아의 어머니 역할을 맡은 오다케 시노부가 자신의 심정을 10분 넘게 토로하고 다른 4식구는 듣는 장면이 있습니다. 사카모토 유지의 대사는 시적이면서도 경험한 적도 없고 상상한 적도 없는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마음은 이런 것이구나 느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우리 세대들은 어렸을 때부터 "말을 많이 하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훈계를 받았던 것 같음! 그래서 가급적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선 말을 안하고, 친한 사람들하고만 속닥속닥~~~~ 공론은 사라지고 우리끼리만 쑥덕쑥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