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쓸까말까 망설여질 때가 있어. 게으름 때문일 수도 있고 주제에 대한 불편함 때문일 때도 있어. 두 개가 뒤섞여 있을 때도 있는데, 지금이 그래.
직장생활의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는데, 의도적인 게 아니야. 골목에서 뭔가 갑자기 튀어나오듯이 말이야. 골목은 으레 그런 곳이니려니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지만서도.
꽤 많은 회사를 다녔어. 지금은 그나마 덜하다고는 하던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2~3년 다니고 회사를 그만두는 건 ‘조직 생활’을 하는데 있어 심각한 결격 사유였어. 보수적인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야.
사람의 기억은 본인에게 유리하게 미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기억이 떠오른 김에 최대한 여러 번 곱씹으며 되짚어봤어. 후회도 반성도 아닌 복기를 위해서. 나는 왜 그랬을까?
어렸을 때 아웃사이더를 자처한 적이 있긴 하지만 회사를 다닐 때만큼은 ‘적합자’처럼 능숙해보이고 싶었어. 내 직관과 충돌하는 상황에서도 ‘사회/조직/회사 생활’을 하려면 일단 참고 적응하고 받아들여질만한 반응을 보여야 성숙한 직장인이자 어른이고 그래야 더 ‘성장’할 수 있지, 라고 반사적으로 되뇌었어.
결국 (내 관점에서) 조직의 불합리함에 대한 인내가 한계 용량에 다다르면 태업에 가까운 상태가 되고, 일말의 양심 같은 것 때문에 회사나 내게 최선의 선택은 퇴사하는 것뿐이라는, 매번 같은 결론에 이르렀었지.
이직하고 나서는 이번에는 다르겠지, 경험치가 더 쌓인 나는 더 잘 적응할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재직 기간에 다소 차이가 생길 뿐이었어. 나는 왜 다른 사람들처럼 무던히 한 두 개의 회사에서 5년, 10년, 15년, 20년씩 다니지 못하는 걸까, 라며 자문한 적도 많았어. 왜 그렇게 참기 힘든 걸까? 결국은 부적응자였던 건가?
맞벌이여서, 믿는 구석이 있어서, 당장 굶지는 않아서 그런 걸까? 그렇다고 해서 내 일을 싫어한 건 아니었어. 인터넷은 내 이십 대 이후의 삶을 좋게도 나쁘게도 많이 바꿔 놓았거든. 그 안에서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전문성을 쌓기 위해 노력했고 ‘전문가’ 소리도 듣고 싶었어. 그렇게하면 뭐라도 될 줄 알았지.
그러나 회사라는 곳에서 대부분의 전문성은 대부분의 경우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한참 뒤에야 깨달았네. 그냥 월급은 받을 수 있는 자격 정도일 뿐이었지. 사내 정치 같은 얘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야. 의사 결정을 하는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전문성과는 다른 전문성과 자격을 갖고 있을 뿐이니까.
내가 그런 의사 결정 권한이 있는 사내 권력을 탐했을 수 있어. 작은 권력이라도 움켜쥐고 있을 때 불합리한 결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역시 좌절감을 안겨 줬겠지. 절대 아니다, 라고 할 자신은 없어. 그래도 뻔뻔히 얘기하자면, 내가 원했던 최소한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의사 결정이었는데, 그것이 내 부적응의 원인이라는 것에는 아직도 완전히 수긍은 안 돼.
그 기대가 어긋날 때마다 퇴사의 정당성은 매번 쌓여갔던 것이고, 그것이 반복된 거지. 그런데 그 인내심이라는 게 한 회사를 그만두고 나면 리셋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할당된 최대치가 있었나 봐. 이젠 꽉 차버린 느낌이다.
얼마 전에 ‘행복 U곡선(The Happiness U-Curve)’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 아래 그림을 보면 X축이 나이이고, Y축이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도야. 여론 조사를 바탕으로 만든 것인데, 세계 많은 나라에서 이와 같은 추세의 곡선이 나온다고 해1. 50세 전후에 만족도가 최하를 기록하고 그 이후부터는 나이를 먹을 수록 계속 상승한다는 거야(‘The Real Roots of Midlife Crisis’ (The Atlantic)를 참고).
이 칼럼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시간의 지평이 짧아지면서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것, 일반적으로 의미 있는 관계에 투자하고 이러한 투자를 통해 점점 더 큰 만족을 얻습니다." ⋯ 중년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회적 경쟁보다는 사회적 관계의 측면에서 자신의 삶을 평가하기 시작하는 재조정의 시기입니다.
— ‘The Real Roots of Midlife Crisis’ (The Atlantic) 중2
나도 앞으로 살 날이 산 날보다 적을 거라는 사실이 강하게 자각되는 순간이 있었어. 그 이후의 변화는,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중요한 것을 찾게 되고 그에 따라 쓸데 없어 보이는 것이 많아졌다는 거야. 정말 머리 속에 있던 “시간의 지평”이 축소되니까 사고 방식이 달라진 것 같아.
회사에서 자아 실현과 금전 취득을 모두 하려는 시도는 내게 무리였던 것 같고, 그 과정에 있었던 갈등, 반목, 비난, 작당, 공격, 방어, 흥분, 증오, 실망, 좌절 등등이 돌이켜보면 덧없게 느껴져. 그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그래, 그렇다면 나의 좋은 부분일까, 나쁜 부분일까, 둘 다일까?
앞으로의 숙제는 내게 중요한 것을 하며 생활을 위한 금전 취득도 동시에 해야 한다는 거야. 그럼 이번에는 똑같은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내 안의 불합리함과 마주치진 않을까? 결국 남는 건 뭘까? 여전히 수수께끼의 연속이야.
이 칼럼을 쓴 Jonathan Rauch의, 같은 주제의 책이 출간되어 있다. 한국어판 제목은 《인생은 왜 50부터 반등하는가》.
전-직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전-남자친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어서 (일기장에 끼적대는 것조차) 어색하지만 ... 덕분에 저도 고민한 터라 생각나는 대로 끄적거려봅니다. 전-직장을 6년쯤 다닌 게 최장이었어요. 일 자체에 불만은 없어서 스트레스가 생길 것 같으면 일에 더 집중해버리는 기질과 이러저러한 내적 외적 요소들 탓이었는지 수술 직전까지 가는 바람에 여차저차한 과정을 겪으면서 퇴사했죠. 퇴직금 까먹으면서 좀 더 쉬었어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한데 대학 때부터 어떤 형태의 무슨 일이든 쉬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수술 여부 확정까지 두 달쯤 쉬니 오히려 우울증 생길 것 같더라구요. 내 생각이 전부 틀린 건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요. 다행히 수술은 안 해도 된대서 바로 취직을 해버렸더니 지금 당장 우울증까지는 안 갈 것 같아요. 재택근무와 초단시간(뭐라 하던데 아무튼 저런)근무를 병행하면서 이전과는 달리 상당히 자유롭게 지내다보니, 온전히 나에 대해 생각하고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건강을 돌볼 시간이 있어야 했는데 전에는 그렇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 하는 이상한 생각이 요즘은 꽤 자주 듭니다. 요는, 스마일 곡선으로 보일 만큼 삶의 만족도가 개미발톱만큼 높아졌다? ...--;;
전 지금 바닥인 나이이군요. ㅎㅎ 방황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