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이나다 도요시(지음), 황미숙(옮김), 현대지성, 2022.
1990년대 VHS 비디오 테이프로 집에서 영화를 볼 때도 역시 빨리 감기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었고 ‘변화’라고 부를 수 있을만큼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도 많지 않았다.
이 책은 제목대로, 디지털화된 각종 영상 컨텐츠(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를 정상 속도가 아닌, 더 빠른 속도로 보거나 건너뛰기 기능을 이용해 “소비”하는 행위와 그 행위자들(이하 ‘빨리 보는 사람들’)에 대해 분석한다.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대비가 있다.
사전적인 정의가 어떠하든 “그건 예술 이야기죠”라고 말한 이는 ‘예술’과 ‘오락’을 반대말처럼 사용하고 있다. (p.58)
종합하면 이렇다.
작품 — 예술 — 감상 — 감상 모드
vs.
컨텐츠 — 오락 — 소비 — 정보 수집 모드
‘빨리 보는 사람들’은 오락을 위해 컨텐츠를 소비한다. 정보 수집 모드에서는 내게 필요한 것만을 찾기 위해 탐색한다.1 그러므로 더 빠른 속도로 봐야한다. 정상 속도로 보는 것은 ‘가성비’가 나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핵심어 세 개로 압축한다면 가성비, 생존, 불쾌감이다.
대학생들은 취미나 오락에서 쉽게 무언가를 얻거나 빠르게 전문가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멀리 돌아가는 것은 꺼린다. 방대한 시간을 들여 몇백 편, 몇천 편의 작품을 보거나 읽는 과정,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기만의 관점을 얻는 과정, 결국에는 인생작을 만나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과정을 전혀 선호하지 않는다. … 그들은 “봐야 할 중요한 작품의 목록을 알려 달라”고 한다. 지름길을 찾는다. (p.24)
자기계발서를 예로 들면 평소에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일수록 ‘모든 본질을 한 권으로 정리한 책’을 무척 좋아한다. (pp.139-140)
시간 가성비 지상주의 뒤에는 시간 낭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 “다들 모험을 안 해요. 그래서 되는 작품과 안 되는 작품의 양극화가 심하죠.” … 결과적으로 일부 작품에만 관객이 집중된다. (pp.129-130)
왜 시간 가성비 지상주의에 쫓기며 사는 걸까?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다. 그들에게는 ‘개성적이어야 한다’라는 세상의 압력이 존재한다. [일본의] 밀레니얼 세대에게 특히 강했던 이 압력은 일본 유명 그룹 ‘SMAP’의 히트곡 가사 중 “넘버원보다 온리원”이라는 부분이 잘 보여준다. (p.112)
“그들에게 개성은 특징이라기보다 통달해야 할 기술이자 전제조건”(p.112)이고, “그것에 대해 아는 사람, 익숙한 사람이 적은 개성은 개성으로서의 가성비가 좋지 않다”. “너무 개성적인 개성은 개성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pp.113-114) 특히 “SNS는 한 분야의 최강자를 ‘바로 곁에 있는 존재’로 직면하게 만들었다. 자신과의 압도적인 차이를 매분, 매초마다 스마트폰 너머로 확인하게 되는 셈이다.”(p.124) 섵부른 개성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성비를 기준으로 한, 생존을 위한 개성 구축 과정에서 컨텐츠 소비가 이루어진다. ‘빨리 보는 사람들’은 이 소비 행위에서 불쾌감이 느껴지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어떤 논점이나 문제에 대해 찬성과 반대 의견이 바삐 오가면 그만큼 소통에 힘이 든다. 즉, 불쾌해진다. 이런 불쾌함을 피하기 위해 빠르게 정답을 알려주는 곳에 사람이 모인다. (p.77)
아무리 각본이 좋아도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드라마는 시청률이 저조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심각한 사회 문제를 배경으로 그리려고 해도 반드시 코믹 요소를 가미해야 한다. … 머리를 계속 굴리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복선이나 심층적인 주제, 고도의 아이러니를 섞은 위트는 외면당한다. … TV 드라마에서든 스포츠 프로그램에서든 스트레스 해소 기능이 요구된다. … 그들은 가성비를 추구하면서도 불쾌한 것을 교묘하게 피하고 있다. (pp.152-153)
현재의 컨텐츠들은 시원한 ‘사이다’로 소비자들의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줘야하고(그것도 자주, 빨리), 이야기가 따라가기 쉬워야 하고, 어렵게 꼬인 복선이나 비극적 결말로 불쾌감을 줘서는 안 된다.
큰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는 웹소설, 서브컬처물 등의 주요 클리셰 중 하나인 ‘타임슬립’에 대한 저자의 인용도 주목할만하다. 타임슬립물은 “‘현대를 사는 일반인이 다른 세계로 굴러 들어가 현대의 지식, 경험, 기술을 살려 그 세계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선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경향은 “‘식민주의적 태도’라고” 할 수 있는데, “우위에 서는 문명이 열위에 있는 야만을 지배 및 계몽한다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시작부터 모든 것이 갖추어진 설정’”, 다시 말해 주인공이 ‘만렙’으로 시작하는 것인데, 역시 “독자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pp.146-148)
책을 읽으며 여기저기서 내 모습의 파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태어난 이후로 계속 ‘화면’(스크린, 모니터 등)을 이용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화면을 훑어보며 원하는 것을 찾는 읽기 방식에 익숙해져서, 습관적으로 영상도 그런 정보 수집 대상으로 보거나 훑어보는 대상으로 보게 된 것은 아닐까하는 개인적인 의문이 있다.
> "내게 보이는 것은 나르시시즘이다. 예술은 우리를 안심시켜야지 결코 우리를 위협하거나 우리가 모자라고 무지하고 미숙하다고 느끼게 만들어서는 안되고, 우리의 소중하고 졸렬한 자아를 반사해 보여줘서는 안된다는 요구." https://www.pado.kr/article/2023060210258852325
통하는 내용.
> "대학생들은 .. 쉽게 무언가를 얻거나 빠르게 전문가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멀리 돌아가는 것은 꺼린다."
> "시간 가성비 지상주의 뒤에는 시간 낭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 "왜 .. 쫓기며 사는 걸까?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다."
...까지 왔으면 진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소비자본주의의 가스라이팅'까지 다룰 만도 한데 뭔가 아쉽네요. 제가 세상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어서 그럴까요? (그나저나 첫 문장 너무 꼰머미 낭낭한데요.)
제가 지난 책 10권 충동구매 글에서 말씀드렸던 오타쿠 문화 분석 책인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문화의 빠른 섭취를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지만, 그 원인을 "서사를 소비하는 것에서 설정을 소비하는 것으로 바뀐 오타쿠 문화"에서 찾아요. 그리고 전직 오타쿠로서 매우 공감이 갔습니다. 설정을 소비한다는 분석은 생각할 거리를 여럿 낳는데, 서브컬처 컨텐츠를 소비할 때는 작품 자체를 보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커뮤니티에서 의견을 신나게 교환하거나 2차, 3차 창작물을 보는 것까지가 컨텐츠 감상이거든요. 그렇다보니 작품 자체를 보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데다, 문화를 주체적으로 선택해서 즐기기보다는 지금 유행하는 컨텐츠를 따라가야 한다고 다들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럼 포스트모더니즘 시기를 지나면서 문화를 즐기는 방법론이 달라진, 그저 "시대가 달라진 것" 아니냐고 볼 수도 있겠어요. 설정놀음으로 가장 유명한 작품이 1995년작 "신세기 에반게리온"인걸 보면 스크린의 변화보다 덕질 양상의 변화가 앞서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문화가 변해가는 것은 더 많은 책과 굿즈를 팔기 위한 컨텐츠 공급자의 의도가 아니겠습니까?(라는건 제 생각이에요.) 한동안 FOMO (Fear of missing out)라는 신조어가 유행했던 것 같은데 비단 서브컬처나 문화계뿐 아니라 일상 전반에서 흐름 놓치는 걸 두려워하게 되었죠. 카카오와 메타, 그리고 네르프가 원하던 세계는 이미 찾아오지 않았나 싶어요. (아 <도둑맞은 집중력> 다시 봐야되는데!)
대 GPT의 시대가 되었어요. 이제 사람이 컨텐츠를 요약해줄 필요도 없어요. 요약의 요약의 요약을 섭취하는 시대가 되겠죠. 언젠가 어디선가 (아마 여기서) 본 표현인데, 정말 이제는 컨텐츠 소비자보다 생산자가 압도적으로 많아질거에요. 세상이 어떻게 변해갈 지 궁금해지네요. 다가올 AI는 스카이넷이 되는가 매트릭스가 되는가. (둘 다 디스토피아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