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2 내가 빌린 책들은 왜 읽은 흔적이 없을까?
서울 정독도서관 사용기
모든 책을 다 사서 읽을 수는 없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이르렀다.
읽지 않은 채로 쌓여있는 책은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준다. 서점에 가서 훑어보는 것으로는 이 책을 사도 된다는 확신을 얻을 수 없었다.
공간 문제도 한몫한다. 예전보다 많은 책을 읽다보니 다 읽은 책들이 처치 곤란이다. 중고로는 팔 수 없는 처참한 상태이고, 아까워서 무작정 버릴 수도 없다보니 한켠에 쌓여만 간다.
또 다른 이유는, 이제 물건들이 버겁다는, 가벼워지고 싶다는 느낌이다. 불가능하겠지만, 내 책장에서 '뼈'만 싹 발라내어지고 나머지는 모두 없어지는 상상을 하곤 한다. 어떤 책들이 몇 권이나 남을지 궁금하다.
해결책은 이미 알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면 된다. 조금만 걸어가면 정독도서관이 있다. 내가 찾는 책들은 운 좋게도 대부분 '대출가능' 상태이다. 한 번에 빌릴 수 있는 책은 모두 7권이고, 대출 기간은 2주이며, 대출연장도 1회 가능하니 적당하다.
모두 10권을 빌렸다. 사려던 책과 애매한 책 들이 섞여있다. '9월 독서의 달' 행사로 "두 배로 대출" 해준다고 한다.
《1980년대 한국영화》
《지(知)의 관객 만들기》
《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
《오리들》
《갑골문 고급 자전》
《아무튼, 데모》
《산으로 가는 이야기》
〈서울 리뷰 오브 북스〉 9(나이듦과 노년에 대하여), 14(믿음, 주술, 애니미즘), 16(만화라는 소우주)
1980년대는 내가 공교육을 받은 기간과 거의 겹치는데, 당시 영화는 등하교길에 마주치는 야릇한 포스터들 — 가령 요즘 넷플릭스에 공개된 〈애마〉에 영감을 줬을 〈애마부인〉은 물론이고 〈어우동〉, 〈무릎과 무릎 사이〉, 〈수렁에서 건진 내 딸〉, 〈뼈와 살이 타는 밤〉, 〈매춘〉, 〈씨받이〉 등 당시 우민화 정책과 맞물린 영화들 — 을 보고 상상력만으로 내용을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나중에 보게 된 몇몇 영화들 중 내 상상과 일치하는 것은 많지 않았다.
공부라는 의무를 짊어진 학생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 고등학생 때는 그런 의무를 잠시 내려놓고 기말고사가 끝난 날 친구들과 을지로로 달려가 은밀하게 〈와일드 오키드〉를 보기도 했다 — 그런 이유로 1980년대에 영화, 특히 한국영화 — 당시에는 '방화'(邦畫)라고 했던 것 같은데 — 는 내게 가까이 할 수 없는, 금지된 것이었다.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바보선언〉, 〈고래사냥〉, 〈바람 불어 좋은 날〉 같은 명작들도 성인이 된 후에야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한국영화》는 이렇게 뻥뚫린 시기를 채워보려는 시도를 위한 책이다.
《지의 관객 만들기》는 아즈마 히로키, 《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은 우네 츠네히로의 책으로 모두 일본 저자들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현재 가장 각광 받는 일본 사상가이다. 그의 저서는 대부분이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는데, 사상의 깊이와 독창성은 잘 모르겠으나 현대의 혼란한 현상들을 정합성을 가진 쉬운 언어로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한다는 데 장점이 있는 것 같다. 《지(知)의 관객 만들기》는 지식 관련 기업을 창업하고 운영하며 겪은 좌충우돌을 기록했다고 해서 읽어보고 싶었으나, 사기는 좀 애매한 그런 책이었다.
《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은 서브컬처,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 이번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에 대한 폭발적인 국내 반응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 대중화된 오타쿠 문화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읽으려고 했었으나 절판이 돼서 빌렸다. 알라딘 중고 최저가가 무려 61,000원이다.
《오리들: 돈과 기름의 땅, 오일샌드에서 보낸 2년》은 그래픽노블인데, 역시 명작으로 칭송되는 작품이다. 편견이었겠지만, 도서관에 그래픽노블도 있어서 꽤 반가웠다.
《한자의 유혹》을 읽은 후부터 갑골문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서 《갑골문 고급 자전》을 사 보려고 했으나, 우선 빌려서 본 후에 살만한지 확인하려고 한다. 앞으로 전각도 갑골문으로 많이 새길 것 같다.
《아무튼, 데모》는 〈노상기록〉 '이달의 작가'인 정보라 작가가 쓴 에세이이다. 인터뷰에서 자신의 취미가 데모라고 밝힐 정도로 시위 현장 참여에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버섯 농장》의 성혜령 작가가 쓴 《산으로 가는 이야기》는 2024년 12월에 출간된, 152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얇은 소설책이다. 앞으로 기대가 되는 작가라서 책의 형식은 좀 이상하지만 읽어보고 싶었다.
〈서울 리뷰 오브 북스〉는 좋아하는 계간지는 아니지만 내 관심 주제를 다룬 호들에서 관련 책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겠다 싶어 빌렸다.
그리고, 꿀팁 하나를 알려드리겠다.
가끔 공부를 하다보면 논문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런데 한국 논문은 대부분 DBpia에서 유료로 읽을 수밖에 없다. 학교에 적을 두고 있거나 회사에서 사용하고 있다면 문제가 없지만, 기댈곳 없는 개인들은 유료구독을 하거나 논문별로 구입을 해야하는 부담이 있다.
그러나, 이제 개인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정독도서관 같은 공립도서관에 가서 와이파이에 접속한 후 '소속 기관/학교 인증'을 하면 집에 돌아와서도 180일 간 사용할 수 있다. 이건 도서관 홈페이지에서도 안내하고 있는 방법이니 합법적이다.
노트북을 들고가야 하나 싶었는데, 핸드폰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DBpia 모바일 앱에 로그인한 후 인증하니까 끝이다. 이제 보고 싶은 논문을 맘껏 볼 수 있어서 좋긴 한데, 논문에 이렇게 페이월을 쌓아놓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 〈노상기록〉 64호(2025.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