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보내드리는 글은 〈노상기록〉 21호(2025.5.19)입니다.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조앤 디디온의 《상실》을 읽었습니다. 넷플릭스에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 — 〈조앤 디디온의 초상〉(Joan Didion: The Center Will Not Hold) — 도 있더군요. 이 책을 읽고 그에 관해 더 알고 싶어져서, 또 다른 책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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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아무개라는 초등학교 친구가 있었다. 뭐든 열심히 했고, 다른 누구보다 잘해야 했다. 한 사례로, 나보다 일 년 늦게 학교 테니스부를 시작했는데, 나와 게임을 해서 계속 지니까 몇 번이고 계속 게임을 하자며 집에 보내주지 않으려 한 적도 있었다. 항상 뭐든 이겨야 했다. 어린 나이에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이른바 '독한 놈' 유형의 친구였다.
얼마쯤 후에 그 친구로부터 듣게 된 것은, 자신의 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었고 그래서 자기가 동생의 몫까지 두 배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그런 얘기는 클리셰 취급을 받겠지만, 그 말을 하는 홍 아무개의 태도는 단호했다. 나는 그때 그 말의 의미를 산술적으로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아직 죽음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나이였다.
《상실》, 조앤 디디온(지음), 홍한별(옮김), 책읽는수요일, 2023
Joan Didion, The Year of Magical Thinking (2005)
조앤 디디온(1934-2021)은 미국의 작가, 저널리스트이다. 뉴 저널리즘의 선구자이고, 1960년대 반체제 문화에 많은 영감을 준 글들을 썼다고 한다.
이 책은 남편의 급작스러운 사망, 그리고 생사의 기로에 선 딸을 돌보던 시기를 겪으며 쓴 글, 회고록이다.
그 몇 달 동안 내가 죽음에 대해, 병에 대해, 확률과 운에 대해, 좋은 운과 나쁜 운에 대해, 결혼과 아이와 기억에 대해, 슬픔에 대해,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방식에 대해, 온전한 정신이라는 게 얼마나 취약한지에 대해, 삶 자체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들은 모두 흩어졌다. (14)
사람들은 가까운 이의 죽음, 특히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 인과 관계 없음,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을 스스로에게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그 거대한 단절을 메울 뭔가를 찾아 나선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 기반도 모래처럼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단절을 메우기 위해 다양한 방법 — 종교, 주술, 무속, 미신, 내세, 천국, 윤회, 환생, 영웅주의, 돈, 자녀, 업적, 상징 등 — 으로 의미를 찾아나선다. 어차피 인간은 생물학적 죽음 외에는 죽음에 관해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모순의 벽을 넘어설 수 없음에도 말이다.
꽉 찬 다섯 길 아래 네 아버지가 누워 있지.
그의 뼈는 산호가 되었다.
그의 예전 두 눈은 진주가 되었다.
그의 어느 부분도 사라지지 않아.
다만 바다-변화를 겪고
진귀하고 기묘한 어떤 것으로 변할 뿐이지.
바다 요정이 시간마다 울린다. 그의 조종을.
— 셰익스피어, 《폭풍우》(The Tempest) 중, 김정환(옮김), 32
이 책의 원제는 "The Year of Magical Thinking"이다. 디디온은 함께 저녁을 먹다 심장마비로 사망한 남편을 떠나보낸 후, 마법적 또는 미신적 사고에 사로잡히게 된다.
나는 그 소식을 최종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머릿속 어떤 층위에는 현재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 있어야 했던 것이다.
(...)
첫 번째 날 밤에는 혼자 있어야 했다.
[남편] 존이 돌아올 수 있으려면, 나 혼자 있어야 했다.
그렇게 나의 마술적 사고의 한 해가 시작되었다. (46)
그것이 디디온이 선택한, 단절을 메우는 방식이었다. 남편이 다시 돌아왔을 때를 위해 구두는 절대 기부하지 않고, 불행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지 않기 위해 조금이라도 불길했던 도시와 거리는 피해다니고, 남편과의 기억을 되짚으며 자신이 그때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결과가 바뀌었을지 상상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잃은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방비로 보인다. 나도 한동안 내가 보이지 않는다고, 형체가 없다고 느꼈다. (99)
우리 한국인들이 고인이 된 사람에게 하는 말들 — 그곳에서는 편안하시길, 더이상 고통이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시길, 다음 생에는 행복하시길, 명복(冥福)1을 빕니다 등 — 에서 내세나 윤회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것이 한국인의 죽음에 관한 지배적 관념 또는 문화일까? 아니면 죽음을 부정하는 하나의 방식일까? '죽으면 다 끝이지 뭐'라고 하는 사람도 혹시 내심으로는 뭔가 계속 이어지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친구 홍 아무개도 이젠 마음 속에서 동생을 잘 보내주었을지 모르겠다.
※ ‘고정되고 확장된 동공’. FDP (Fixed and Dilated pupils). 사망률 75%. (128)
죽은 뒤 저승에서 받는 복. [불교] 죽은 뒤에 받는 복덕. (네이버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