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을 책이라고 한다면 손만 대도 책이 알아서 벌어지는, 항상 펼쳐보는 페이지들이 있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항상 침묵하는 페이지들이 있다. 절대 떠오르지 않는 침몰한 기억들. 가령, 중고등학교 시절 대부분의 기억이라든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휴학을 하고 군대 가기 직전까지의 기억이라든가, 직장생활 초반 5년 여 동안의 기억 같은 것들이다. 이 기억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친밀한 관계를 맺겠다고 누군가에게 다가가려 하면 번번이 주제넘게 남을 경멸하는 마음이 이를 가로막았다. (...) 첫걸음을 내딛는 행위를 멸시하고 평범한 인간의 상호 교감을 형성하는 사소하고 하찮은 일들을 깔보았기 때문이다. (47)
아주 오랫동안 감정과는 서먹한 사이였다. 가까이 하면 내가 약해지고 위험해질 것 같은 그런 무엇이었다. 그래서 멀리하고 둔감해지려고 했다. 그 결과로 감정을 잘 모르게 되었고 당연히 글로든 말로든 잘 표현하지도 못했다.
감각하는 인간이면서도 자기내면과 대화할 줄 모르고, 언어가 없어서 기쁨을 잃은 본연의 자아에 접근할 길도 막혀버린. (39)
그것은 갑옷이 되고, 뒷면의 속살은 계속 연약해졌다. 그리고 갑옷마저 세월에 서서히 닳아 없어지면서 무방비한 속살이 어리둥절해하며 빼꼼히 드러났다. 이제 침몰한 기억들을 인양할 차례다.
독자로 하여금 [엘리자베스 보엔] 자신이 깊이 이해했던 단 하나 — 극단적인 심리 상태 — 의 힘을 실감하게 만드는 데 있었다는 걸. 감정을 두려워하는 그 심리. (93)
《끝나지 않은 일》, 비비언 고닉(지음), 김선형(옮김), 글항아리, 2024
Vivian Gornick, Unfinished Business: Notes of a Chronic Re-reader (2020)
기억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모두 최근에 읽은 작가들 — 비비언 고닉, 아일린 마일스, 올리비아 랭, 리디아 데이비스, 매기 넬슨 — 덕이다. 이들이 기억, 감정, 문학, 글을 다루는 모습을 엿봄으로써 구속된 내 어떤 부분이 석방된 느낌이다. 그게 이런 감정이었구나, 이걸 이렇게 느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불안과 위험을 각오하고 끝까지 감정을 파고들어 이렇게 글을 쓸 수도 있구나 같은 것들.
문학작품의 중심 드라마는 늘 치명적으로 유독한 인간의 자아분열에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 위대한 문학은 통합된 실존이라는 업적이 아니라, 그 위엄을 향해 발버둥 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각인된 분투의 기록이다. (26)
이 책은 비비언 고닉의 《상황과 이야기》에 설득되어 바로 읽게 되었다. 고닉의 글쓰기는 '일인칭 저널리즘' 또는 '개인 저널리즘'1을 표방한다. 이 책 《끝나지 않은 일》을 번역한 김선형 박사는 'personal'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의미를 당연히 인정하지만, "자기 자신을 페르소나로 앞세워 '독자가 화자의 시선을 그대로 따라 보도록' 쓰는 고유의 논픽션 방식을 좀더 정확히 지칭하기 위해서는 'person'을 '인칭'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글쓰기의 양식은 사적일지 모르나, 사회문화적 맥락을 최우선에 놓는 담론의 지향은 흔들림 없이 공적이기 때문"2이라고 한다. 동의한다.
고닉은 이 방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독자가 내 시선을 그대로 따라 보도록, 허구를 창작하듯 서사를 설정했는데, 그렇게 나 자신을 참여적 서술자로 활용하니 독자로 하여금 그날 밤 사건을 내가 겪은 그대로 경험하고, 내가 느낀 날것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게끔 할 수 있었다. (16)
'일인칭'과 '저널리즘'을 균형감 있게 병치하고 각 부분이 실제로 조립되는 방식을 파악하며 상황이 현장에서 체감되는 느낌을 포착해야 했다. (19)
이 책(만은 아니겠지만)을 읽을수록 느끼는 절망감3은, 읽은 책이 거의 없을뿐더러4 아는 작가도 거의 없다 — 고작 D. H. 로런스, 마르그리트 뒤라스 정도 — 는 사실이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나는 이 책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세계문학'들은 한국 독자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그 작품들로부터 나온 문학론은 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같은 질문들이 떠올랐다.
고닉은 그 책들을 다시 읽을 때마다 또 다른 의미를 찾거나 전혀 다른 책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에 스스로 놀란다. 함께 놀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그러나 꼭 같은 책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이른다. 나도 나만의, 다시 읽을 책을 찾으면 된다. 인생의 어느 시점부터 소설은 읽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말이다.
문학작품에는 일관성을 갈구하는 열망과 어설프고 미숙한 것들에 형태를 부여하려는 비상한 시도가 각인되어 있어, 우리는 거기서 평화와 흥분, 안온과 위로를 얻는다. (10)
문학을 바라보는 내 관점에도 변화가 있을 것인가.
'personal journalism'의 다른 번역어들.
오로지 '개인적'이기만 할 경우, 독자가 작가의 정체성이나 에토스에 공감하지 않았을 때, 그 글은 그저 '저널'이 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게 '사소설'(私小說)류의 한계 아닐까.
다행히 열패감까지는 아니고.
한국어판이 없는 책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