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노상기록〉 15호(2025.5.5)에 실린 글입니다.
어니스트 베커(1924~1974)는 1960년에 서구 정신의학과 종교 특히 일본 선불교와의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 등의 강단에 서며 혁신적인 교수법으로 학생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행정적 마찰과 학문적 견해 충돌로 어려움을 겪고 재계약이 무산되었다고 한다.이 책 《죽음의 부정》은 1974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저자소개 중)
베커 사후에 출판된 《악에서 벗어나기》는 서울외계인 팟캐스트에서 정리했었다.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죽음의 부정》은 절판 상태여서 《악에서 벗어나기》를 먼저 읽었던 것인데,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선물해준 《죽음의 부정》을 책장에서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읽기 시작했던 것이다.
《죽음의 부정》, 어니스트 베커(지음), 노승영(옮김), 한빛비즈, 2019
Ernest Becker, The Denial of Death (1973)
번역자인 노승영씨가 자신의 트위터에, 새로운 서문 번역본과 교정본까지 출판사에 넘겼다고 하니 조만간 새로운 한국어판이 출간될 것 같다. 구하기 힘든 책은 소개하기가 꺼려졌는데 다행이다. 아무리 좋은 책이더라도 중고가를 이렇게까지 높게 받는다는 것은 좋게 봐주기 힘들다.
이 책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간격을 두고 여러 번 써 볼 생각이다. 그때마다 내 이해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관찰해보려고 하는데,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악에서 벗어나기》와 비교했을 때 더 많은 자료와 논증들로 이루어졌다. 그 중심을 이루는 학자는 세 명, 즉 키르케고르, 프로이트, 랑크이다. 특히 오토 랑크는 베커 사상의 시작이자 끝일 정도로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랑크는 프로이트의 총애를 받던 제자 중 한 명이었으나 나중에는 사상적으로 결별하고 자신의 독자적 이론을 수립했다. 베커 역시 프로이트의 분명한 한계를 지적하며, 오히려 시대적으로 앞선 키르케고르가 프로이트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논증을 펼친다.
샘 킨은 서문에서 베커의 철학을 "네 가닥의 끈으로 엮은 매듭"으로 과감하게 요약했다.
세상은 끔찍하다
인간 행동의 기본적 동기는 자신의 기본적 불안을 다스리고 죽음의 공포를 부정하려는 생물학적 욕구다
죽음의 공포가 어찌나 압도적인지 우리는 이 공포를 무의식에 묻어두려 한다
악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우리의 영웅 기획은 더 많은 악을 세상에 불러들이는 역설적 결과를 낳는다
《죽음의 부정》은 1, 2, 3을 상세히 다루고, 《악에서 벗어나기》는 넷 모두를 다루지만 4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저 "매듭"들에서도 점증하는 역설을 느낄 수 있는데, 우리의 피부에 느껴지는 "진짜 실존적 딜레마"를 베커는 이렇게 서술한다.
사람은 오랜 세월을 들여 독자적 존재가 되고, 자기만의 재능을 발전시키고, 세상에 대한 분별력을 가다듬고, 취향을 넓히고 벼리고, 삶의 실망거리를 감당하는 법을 배우고, 성숙하고 무르익어 마침내 자연 속의 고유한 피조물이 되고, 존엄과 고귀함을 갖춰 동물적 조건을 초월하며, 더는 휘둘리지 않고 더는 완전한 반사작용에 머물지 않고 어떠한 틀에서도 찍혀나오지 않는다. 그러고 나면 ... 진짜 비극이 시작된다. 60년간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어가며 그런 개인을 만들어놨는데, 이제 그가 잘하는 것은 죽는 일뿐인 것이다. 이 고통스러운 역설 ... 요점은 우리가 최고의 개인적 발전과 해방을 성취하더라도 인간 조건의 진짜 절망을 맞닥뜨린다는 것이다. (415)
베커는 키르케고르가 "실존적 역설을 현대 심리학에 강력하게 도입"(68)했다고 평가한다. "우리 시대 인간학의 총체적 지식 구조와 연결"하고 "종교적 범주와 정신의학적 범주의 융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키르케고르의 저작"(127-128)이다. "인간의 불안, 인간이 자신의 동물적 한계를 의식하는 동물이라는 인간적 역설에서 비롯하는 불안"은 "자신이 처한 조건의 진실을 인식한 결과다. ... 그것은 자신이 벌레 먹이 신세임을 안다는 뜻이다. 이것이 공포의 근원이다.”(156-157)
무에서 생겨나 이름, 자의식, 깊은 내적 감정, 삶과 자기표현에 대한 고통스러운 내적 열망을 가지는 것. 이 모든 것을 가지고도 죽어야 한다는 것. 마치 장난 같다. 문화적 인간의 한 유형이 신이라는 개념에 맞서 공공연히 봉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신이 벌레 먹이를 그토록 복잡하고 근사하게 창조하겠는가? (157)
“인간 동물을 특징짓는 것이 삶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두 가지 거대한 두려움임을 안다.” (106)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실존적 역설로부터 오는 불안을 잠재우고 살아갈 수 있는 걸까? 베커는 이에 관해 절대 솔깃한 결론을 내놓지 않는다. 그의 결론은 간신히 "회의주의"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회의주의는 "잠재적 무의미함을 더 급진적으로 경험하고 더 인간답게 맞닥뜨리는 것"(431)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렇게 결론내릴 수 있다. 인간적 한계에 대한 승리를 과학적·신화적으로 구성하는 것과 같은 원대한 기획은 과학으로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런 기획은 창조의 악몽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대중의 필수적 에너지에서 비롯하며, 심지어 인간의 손으로 프로그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 삶을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어떤 형태를 띨지, 우리의 고통스러운 탐색에서 어떤 쓰임새를 찾아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언가 — 대상이나 우리 자신 — 를 만들어내어 혼란에 빠뜨리고 그것을 (말하자면) 생명력에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438-439)
이 책은 우리를 정신적으로 홀딱 발가벗기고 ‘너는 어떤 거짓말에 의지하며 살고 있니?’라고 묻는다. 그 앞에서 우물쭈물하며 대답할 것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