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의 목적이 아닌 이상 실리콘밸리와 그들의 세계관에 주목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은 'The Silicon Valley Canon: On the Paıdeía of the American Tech Elite'에서 소개한 이른바 "실리콘밸리 정전正典(the silicon valley canon)" 같은 책 목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목록에서 가장 오래된 책은 1951년에 출간된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이에요. 이에 대한 테드 지오이아의 글을 인용해보면,
이 목록들은 주로 SF, 대중 심리학, 한때 유행했던 저널리즘, 전기, 그리고 대중 과학 서적들의 뒤죽박죽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그 목록들은 역사적 관점을 거의 제공하지 않습니다 — 콜리슨이 추천한 책들 중 세 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난 50년 이내에 출간된 책들입니다.
— 테드 지오이아, 〈대안적 기술 정전: 사고를 확장하는 26권의 책〉 중
"canon"1이라는 단어를 쓴 의도는 아마도 실리콘밸리에 기존 질서보다 우월한 세계관이 존재하고, 그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60여 년'에 걸친 지적 전통이 있다는 것을 강변하며 헤게모니 장악을 시도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는 실리콘밸리의 고질적 병폐인 '없지만 일단 있다고 말하기'를 답습한 것일 수도 있구요.
인간적 가치 — 윤리적, 영적, 공동체적 가치 — 는 이 논의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
기술이 핵심 인간적 가치와 전체론적, 공감적인 사고 외부에서 작동하면 파괴적입니다.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분야는 유용하지만, 인간의 번영에 기여할 때만 그렇습니다.
기술 공동체의 세계관이 변경된다면 우리의 문화와 사회를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 탐욕과 통제, 그리고 권력 의지가 아닌, 더 자비롭고 건설적이며 사용자 중심의 가치로 기술 공동체가 변화한다면 말입니다.
— 테드 지오이아, 위의 글
(구독자분들은 익히 알고 있는) 테드 지오이아는 이렇게 '정전'을 자처하는 책 목록의 분명한 한계를 지적하는 것을 넘어 '인문주의적 기술 정전' 26권을 추천했습니다. 이 책들은 "기술 외부에서" 왔고, "디지털 시대의 주요 이슈를 모두 제기"하고 있다고 합니다.
유료구독자용 글이라서 전문 소개가 아닌, 책 목록만 옮깁니다. 한국어판이 있는 경우, 한국어 제목으로 옮기고, 링크(한국어판이 여러 종일 경우에는 제가 샀거나 사고 싶은 책으로 링크)했어요.
윌리엄 셰익스피어: 《폭풍우》(The Tempest) (1611)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1818)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Faust) (1832)
존 러스킨, 《The Nature of Gothic》 (1853);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 (1860)
찰스 디킨스, 《어려운 시절》(Hard Times) (1854)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Walden) (1854)
토마스 만, 《마의 산》(Der Zauberberg) (1924)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예술의 비인간화》(The Dehumanization of Art) (1925)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1932)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1938)
조지 오웰, 《1984》(Nineteen Eighty-Four) (1949)
마르틴 하이데거, 《The Question Concerning Technology》 (1954)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
F.R. Leavis, 《Two Cultures? The Significance of C. P. Snow》 (1962)
필립 K. 딕,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1968)
그레고리 베이트슨, 《마음의 생태학》(Steps to an Ecology of Mind) (1972)
애니 딜러드, 《자연의 지혜》(Pilgrim at Tinker Creek) (1974)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Discipline and Punish) (1975)
William Gaddis, 《J R》 (1975)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 (1981)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 마》(Never Let Me Go) (2005)
이안 맥길크리스트, 《주인과 심부름꾼》(The Master and His Emissary) (2009)
한병철, 《피로사회》 (2015)
안드레아 울프, 《Magnificent Rebels: The First Romantics and the Invention of the Self》 (2022)
찰스 테일러, 《Cosmic Connections: Poetry in the Age of Disenchantment》 (2024)
의외로 한국어판이 없는 책은 6권밖에 되지 않지만 절판된 책이 많네요. 대부분은 중고로 구할 수 있는데, 《마음의 생태학》 같은 경우는 중고 가격이 정가보다 훨씬 높아요.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는 책이어서인지 중고판매자들이 임의로 정한 가격인지는 모르겠네요.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 중에서는 낭만주의를 다루고 있는 《Magnificent Rebels: The First Romantics and the Invention of the Self》에 관심이 갑니다. 번역하면 '위대한 반역자들: 최초의 낭만주의자들과 자아의 탄생'쯤 되겠네요. 2022년 말에 출간됐으니 한국어판을 기대해봐도 되려나요. 하긴 한국어판이 있는 책들도 다 못 읽었는데 번역되지도 않은 책을 기웃거릴 필요는 없겠어요.
이 목록을 기본으로 하여 나 그리고 구독자들의 피드백을 통해 추가해 나가는 것도 재밌고 의미 있을 것 같아요. 일이 년 후면 까맣게 잊혀질 책들은 더 이상 읽고 싶지 않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