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각을 배우면서 한자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주로 한자를 돌에 새기는 예술이다보니 당연한 일이죠. 전각(篆刻)이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이 진나라로 통일된 후 시황제가 정리한 한자인 소전(小篆)을 '주로' 새깁니다.
그렇다고 이 소전만 새기는 것은 아니에요. 한글은 물론이고 다양한 한자 서체를 새기는데, 저는 특히 "청동기에 주조되거나 새겨진 문자"인 금문(金文)에 매료되어서 주로 이 서체를 찾아 새기고 있어요. "춘추전국시대 이전의 인장"1을 통틀어 고새(古璽)라고 하는데, 이 고새에 새겨진 금문인 ‘고새문’은 금문에 비해 조금 가늘면서도 정리되어 있어 각인하기도 좋을 뿐더러 꽤 귀엽고 아름답죠.
소전 이후의 한자 서체들은 네모반듯한 정사각형 안에 꽉 채우는 형태가 대부분이지만, 이 금문과 고새문은 소전 이전의 서체이다보니 네모반듯함과는 거리가 멀어요. 그래서 인장을 설계할 때 각 글자의 크기와 여백을 조화롭게 구성, 배치하는 것이 다른 서체들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 얘기는 반대로, 장법(章法)2을 구사함에 있어서 창작자의 의도와 기량이 발휘될 여지가 더 많다는 것이겠죠.
그래서인지 한 중국 전각대회에서 입선자들의 작품 스타일에 대한 통계를 내보니 '고새' 스타일이 압도적으로 많았어요.
아래 이미지를 보면 共(함께 공)의 각 서체가 어떻게 다른지, 고새문과 금문의 차이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어요. 왼쪽부터 소전, 모인, 간문, (고)새문, 금문, 갑골입니다.3
금문에 관심을 갖다보니 더 깊이 알고 싶어져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관련 서적을 찾아보았죠. 여기서 저는 '일본 현대 최후의 석학'으로 불리는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을 재회하게 됩니다.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1910-2006) 선생은 “세계적인 한문학자·한자학자"로,
중국과 일본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문화적 유형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폭넓은 관점 하에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자료인 은주시대의 갑골문과 금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그 자형분석으로부터 초창기 한자 성립에 있어서의 종교적, 주술적 배경을 밝혀냈다. 이와 같은 그의 학문세계는 결과적으로 오랜 동안 한자 자원연구의 성전이라고 일컬어졌던 《설문해자》의 오류를 밝혔으며, 흔히 '시라카와 문자학'이라고 불린다.
“일생의 대표업적으로 《자통字統》, 《자훈字訓》, 《자통字通》의 자전 3부작"4이 있습니다.
선생의 저서 중 한국어판은 다수가 있는데 판매중인 책은 네 종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절판 상태에요. 이번에 구입한 책은 《한자의 세계》와 《상용자해》 두 권입니다. 《상용자해》는 오랫동안 품절 상태였는데, 다행히도 올해 2쇄를 출간해서 접할 수 있게 되었네요. 두 책의 저자 서문 격의 내용을 지식정원에 간략히 정리했어요.
《한자의 세계: 중국문화의 원점》, 시라카와 시즈카(지음), 고인덕(옮김), 솔출판사, 2008
《한자의 세계》는 "《자통字統》에서 한 글자씩 해설한 문자를 소위 문제사적으로 분류하여 그 계열을 따라 해설을 시도한 것으로 총론적"입니다. 해설한 문자는 모두 1,460자로 "갑골문과 금문의 문자 자료의 거의 대부분을 수록"했고, "이 문자들이 성립한 사회와 문화를 배경으로 하여 그 모든 것을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했어요. 이것은 곧 "문자를 통하여 그 시대와 생활의 전반적인 것을 사고하는 작업"이죠.
이렇게 저자는 "고대문자의 세계를 회복하는 것은 그 시대와 생활, 그 생활을 지탱하였던 사유의 세계를 회복하는 일"이며, "고대 동아시아권 문화의 복원과 본원적인 연대의 회복을 통해 동아시아의 연대를 고려하는 일이 가능해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5
《상용자해常用字解》, 시라카와 시즈카(지음), 박영철(옮김), 길, 2022
《상용자해》는 "역사적인 관련 문헌들의 문자의 훈고(訓詁, 글자의 의미 해석)를 소개하고 자형학(字形學)적으로 그 훈고를 설명할 수 있는지 해설하는 방법"을 취했는데, "주로 중고생을 대상"6으로 썼다고 합니다. 자전 3부작의 업적을 "대중용으로 간략히 한 것"(옮긴이의 말)이죠.
"이 책에서 말하는 '상용한자'는 모두 일본 상용한자"를 가리킵니다. "일본 내각 고시에 따른 상용한자는 모두 2,136자"인데, 일본어판은 "여기에 曰을 추가하여 총 2,137자"를 실었고, 한국어판은 이 표제자들 중 일본식 한자 두 자를 제외했다고 하네요.7
다음의 내용은 갑골문과 금문의 자형을 이용한 저자의 한자 해석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 (후한 시대 기원전 100년)
문자학의 성경으로서 자형학의 기초
그 기초가 된 자료는 주로 진대(秦代)에 통용된 자형인 전문(篆文)
전문은 이미 문자의 원형을 잃어서 갑골문, 금문의 자형과는 다른 것이 많음
사례: 彛(떳떳할 이)
《설문해자》는 전문의 모양에 따라 米
[쌀]
와 糸[실]
를 廾(두 손 공)으로 바치는 모양이라고 설명그러나, 갑골문과 금문의 자형은 닭을 두 손으로 꽉 잡는 모양
꽉 잡아 피를 짜서 그 피를 청동기에 발라 정화하여 제기로 만드는 것을 보이는 글자임
한자는 "생활 환경을 떠나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약 "3천3백 년 전에 한자가 성립했던 당시의 종교적 관념에 기초해서 의례의 본질이 그대로 문자 구조에 반영된 것"이고, "문자를 통해서 그 생활사나 정신사적 이해까지 도달"8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저자의 관점입니다.
이제 시라카와 선생의 책을 읽으며, 돌에 고쇄문과 금문을 새긴다면 더 이상 좋을 수 없겠네요.
지식정원 새 문서
《전각 디자인 탐구》, p.9
전각의 3요소 중 하나로 인장을 설계하는 방법. 전각의 3요소란 자법(字法), 장법(章法), 도법(刀法)을 말함. — 위의 책, p.9
《전각상용자자전》 중.
《한자의 세계》 저자 소개 중.
위의 책, 저자 후기 중.
《상용자해》, '『상용자해』의 편집에 대하여' 중.
위의 책, '일러두기' 중.
위의 책, '『상용자해』의 편집에 대하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