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연설과 수사학 관련 내용을 많이 쓰고 있는데요, 재밌기도 하고 준비하는 것도 있어서 그렇습니다. 특히 지난 호에서 다룬 《대통령을 만드는 레토릭 장르: 말로 한 업적》의 바탕이 된 연구인 로이드 비처의 ‘수사적 상황(rhetorical situation)’이라는 개념을 알고나니 수사학이 더 흥미롭네요.
‘수사적 상황’은 로이드 비처가 1968년에 발표한 논문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 개념에 관해 자세히 알고 싶어서 이 논문을 전체 번역한 후에 요약해 봤어요. 지식정원에서 읽어보시면 되겠구요.
저는 지금까지 연설과 같은 모든 수사적 행위는 연설자, 즉 말하는 사람의 능력과 의지에 그 성공여부가 결정된다고 알고 있었어요. ‘연설을 잘한다’는 건 곧 그 연설을 한 사람에 대한 칭찬이니까요. 그러나 이 ‘수사적 상황’은 연설자의 ‘담론’(말과 글)보다 ‘상황’이 우선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담론에 수사적 특징이 존재한다고 해서, 또는 독자나 청중에게 설득력이 있다고 해서 그 담론이 수사적이라고 볼 수는 없고, 연설이 수사적이 되려면 그것이 수사적 상황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럼 ‘수사적 상황’은 어떻게 정의될까요? 수사적 상황은 사람, 사건, 사물, 관계의 복합체입니다. 그 구성 요소는 모두 세 가지로, ① 긴급한 필요(exigence) ② 청중(audience) ③ 제약들(constraints)입니다.
그리고, 수사적 상황의 일반적인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수사적 담론은 상황에 의해 존재하게 됨
수사적 상황은 상황에 적합한 응답을 요청함
수사적 상황은 어떻게든 그에 맞는 응답을 규정해야 함
수사적 담론을 생성하는 긴급한 필요, 복합체는 현실에 위치하며, 우리 경험의 세계에서 객관적이고 공적으로 관찰 가능한 역사적 사실들임
수사적 상황은 단순하거나 복잡한 구조를 가지며, 더 조직적이거나 덜 조직적일 수 있음
수사적 상황은 발생하고, 성숙하거나 쇠퇴하거나 성숙하고 지속되거나, 이론적으로는 무기한 지속될 수 있음
좀 길지만, 이해를 위해 우리에게 그나마 익숙한 사례를 논문에서 인용해 볼게요.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으로 인해 생성된 상황은 매우 구조화되고 설득력이 강해, 곧 다가올 담론의 유형과 주제를 거의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암살 소식이 처음 전해지자마자, 정보에 대한 절박한 필요가 즉시 발생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기자들은 수백 개의 메시지를 작성했습니다.
이후 상황이 변화하면서 다른 긴급한 필요들이 발생했습니다. 댈러스에서 벌어진 엄청난 사건들이 설명되어야 했고, 암살당한 대통령을 기리기 위한 추모가 필요했습니다. 대중은 새 정부로의 권력 이양이 질서 정연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메시지들은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니었습니다. 역사적 상황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고, 대응이 거의 필연적으로 생성되었습니다. 그 대응들, 즉 뉴스 보도, 설명, 추모 연설들은 상황에 참여하여 여러 긴급한 필요를 긍정적으로 수정했습니다.
이 담론이 발표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면 상황의 힘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어떻게 이러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상황이 연설자의 의도에 의해 형성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 연설자의 의도는 상황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연설적 거래는 단순히 연설자가 청중의 요구나 기대에 대응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청중의 기대 역시 비극적인 역사적 사실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존 F. 케네디에 대한 수많은 추모 연설들이 실제로 발표되지 않고, 기록되거나 일기장에 기록되거나 생각 속에서만 생성되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논문 마지막 부분에 충격을 받은 내용이 있어요.
수사학은 우리가 현실에 가치 있는 변화를 일으키는 원칙, 개념, 절차를 제공하는 한 철학적으로 정당화됩니다. 따라서 수사학은 단순히 설득의 기술과 구별되며, 설득의 기술은 과학적 조사에 적합한 정당한 대상이기는 하지만, 실용적 학문으로서의 철학적 정당성을 갖지 못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고전 수사학에는 ‘수사학의 목적은 설득’이라는 대전제가 있죠. 그런데 로이드 비처는 몇천 년 동안 내려온 이 전제를 무너뜨립니다. 수사학은 단순히 설득의 기술이 아니라는 것이죠. 14페이지 밖에 안 되는 이 논문이 수사학의 영역을 확장하고, 그 기반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68년에 발표된 논문이기 때문에 그 이후의 논의는 어떻게 진행됐을지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위키피디아에 ‘Rhetorical situation’ 항목이 있더군요. 이것도 번역했습니다.
읽어보니, 이후 비처의 주장에 대한 중요한 반론도 있었고 확장, 재정의 등도 있었지만, 이 ‘수사적 상황’ 개념의 유효성과 영향력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