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9 대통령은 연설을 잘해야만 할까?
데모스테네스의 '실패한' 연설, 《위대한 수사학 고전들》, 《Presidents Creating the Presidency: Deeds Done in Words》
데모스테네스(BC 384-322)는 아테나이가 마케도니아의 침략 위협에 직면해 있을 때, 아테나이의 민주정과 그리스의 도시국가 체제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고전 수사학에서 정책 연설의 대표적 인물로 꼽는 정치연설가입니다.
그의 연설 도입부를 살펴보죠.
아테네 시민 여러분, 만일 이 자리가 어떤 새로운 사안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였다면, 저는 대부분의 경험 많은 연설가들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실 때까지 기다린 후에, 그분들이 말씀하신 것 중 어떤 것이 마음에 든다면 계속 침묵을 지키고, 그게 아닌 경우에야 제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씀드리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전에도 종종 논의해 왔던 것에 대해서 지금도 여전히 논의하는 상황이기에, 비록 제가 가장 먼저 일어나 말씀드린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이를 충분히 양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이전부터 필요한 충고를 제대로 내놓은 적이 있었더라면 여러분이 지금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 《그리스의 위대한 연설》, p.225
처음부터 매우 도발적입니다. 지금까지 다른 연설가들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죠. 이런 태도로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청중들의 주목을 끌고 이후 내용에 기대감 — '너는 얼마나 다른지 들어보자' 같은 — 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일 수 있겠죠. 또 연설에서 제안하는 정책의 중요성, 시급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일 수도 있구요.
"정치적인 직위를 차지하고 직접적인 영향력을 펼치는 대신, 대중 앞에 서서 연설로 설득을 일궈 냄으로써 정치적인 신념을 아테네에 실현했던 진정한 의미의 수사적 영웅"1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현실적 결과는 그의 훌륭한 연설과 달랐던 것 같습니다.
BC 351년쯤 이루어진 데모스테네스의 이 역사적인 연설 '필립포스를 경계하며'2가 아테나이의 대외 정책에 영향을 준 흔적을 발견할 수 없고3, 아테나이는 결국 마케도니아에 굴복했죠. 그렇다면 수사학의 목적이 '설득'이라는 것만을 고려하면 이 연설은 실패한 연설입니다. 그럼에도 이 연설은 수천 년의 시간을 넘어 위대한 연설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죠. 이건 역설 아닌가요?
그럼 이 역설에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첫째는, 설득에 실패한 연설이라 하더라도 그 자체로 탁월함을 가진 연설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둘째는, 당시 아테나이의 상황을 단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연설로 보는 것이구요. 셋째는, 수사학적으로는 뛰어난 연설이지만 당시의 아테나이는 이런 연설로도 설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고 판단하는 것이에요. 아니면 이것들이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도 있겠죠.
그럼 이런 상상도 해보죠. 설득에 성공한 연설만을 탁월한 연설이라고 본다면, 독일 국민을 이끌고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히틀러의 연설은 훌륭한 연설일까요? 그것을 연구한 책들처럼 설득의 힘은 그 동기(動機, motive)와 따로 분리해 평가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수사학이 '악마의 기술'로 비난 또는 오해 받는 것도 이런 역설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연설이라는 언어 행위를 크게 이 세 가지로 분석해 보고 싶어요. 동기, 수사학 기술, 설득 성공여부. 마지막의 성공여부는 여론 조사나 선거 결과처럼 항상 수치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판단하기 어려울 수 있겠네요. 이건 제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위대한 수사학 고전들》에서 '수사학 장르 평론'에 관한 내용을 읽고 연결된 생각이에요.
'장르 평론'이라는 이 방법은 "[수사학] 평론가에게 수사적 요소와 개념들인 형식, 논증 방식, 문체, 전략, 상황에 대한 인식, 청중의 기대, 신념 체계 등이 불가분한 전체로 융합하여 움직이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합니다. 연설(문)이라는 것이 개인의 설득 의지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관점을 접하고 나니 연설, 수사학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진 것 같아요.
《위대한 수사학 고전들》의 '21장 수사학, 미국 대통령을 만나다'는 칼린 캠벨과 캐슬린 재미슨의 《대통령을 만드는 레토릭 장르: 말로 한 업적》 (2008)을 요약, 소개하고 있어요.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연설이라는 행위에 크게 의존하는 '직업'인 대통령의 연설을 비평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에요.
비평할 수 있는 한국어 연설 기록 대부분이 대통령 또는 정치인 들의 것이고, 한국의 정치 현실은 여전히 대통령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역대 대통령들의 연설을 비평하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봅니다. 아쉽게도 한국어판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어요.
이 책의 관점으로 (대통령은 아니지만) 데모스테네스의 연설을 다시 읽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네요. 그는 아테나이 시민들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설득하기보단 위에서 본 도입부의 내용처럼, 정의감을 앞세워 잘못을 드러내고 부정적인 감정들을 유발해 시민들을 몰아세운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것이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구요.
위의 책, p.14
위의 책, p.225-243
위의 책, p.245
https://millercenter.org/the-presidency/presidential-speeches
대통령 연구presidential scholarship의 거점?인 미국 버지니아 대학의 밀러센터 홈페이지에서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연설을 직접 찾아 들어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