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 보관함을 정리하다가 한 장이 툭 떨어졌어.
우연인가. 2019년에 쓴 카드인데 카드 시스템, 즉 제텔카스텐에 관한 거였네. 이때만해도 카드 쓰는 거에 익숙치 않아서 내용 정리를 제대로 안 해놨어. 그래서 일단 《정리하는 뇌》에서 언급한 위의 내용을 확인하고,
퓰리처상 후보작으로 지명된 책인 《라일라: 윤리 문제의 탐구Lila: An Inquiry into Morals》에서 피어시그는 형이상학에 대한 사고방식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다. 작가의 분신이자 이야기의 주인공인 파이드로스Phaedrus는 철학 개념을 정리하는 데 카드 시스템을 이용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크기 때문에 풀사이즈 종이보다는 카드가 더 좋다고 한다. 임의 접근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카드는 주머니나 지갑에 넣고 다니기 딱 좋은 크기다. 크기가 모두 똑같아서 가지고 다니거나 정리하기도 쉽다(라이프니츠Leibniz는 자기 생각을 적어놓은 종잇조각들의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어서 자꾸 잃어버린다고 불평했다). "접근과 순서 배열을 임의적으로 할 수 있는 작은 덩어리로 정보를 정리할 수 있다면, 순차적인 형태로 정리해야 할 때보다 그 정보의 가치는 훨씬 더 커진다. (중략) 카드는 그의 머리를 비워주고, 순차적 구성을 최소화함으로써 아직 검토하지 못한 참신한 아이디어들이 잊히거나 배제되지 않게 해주었다." 물론 우리 머리가 진정 비워질 수는 없지만, 이 아이디어는 대단히 강력한 효과를 지닌다.
(pp.118-119)
이때 산 《라일라》를 꾸역꾸역 뒤졌지. 당시에 관련 내용을 꼼꼼하게 찾아놓질 않고 한 문단에만 표시가 되어 있어서 이번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넘겨가며 찾아봤어. 이 책을 쓴 로버트 M. 피어시그는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라는 책으로 많이 알려진 작가지. 우여곡절이 많은 사람이더군.
카드 시스템에 관해 쓴 내용은 책 47~53페이지에 있어. 일부 옮겨놨는데, 그 일부의 일부만 인용해보면,
그녀의 여행 가방에 떠밀려 그의 메모 용지 보관함들이 몽땅 도선사용 침상 한쪽 끝에 몰려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메모 용지 보관함들은 그가 현재 집필 중인 책과 관련된 자료들을 보관하기 위한 상자들로, 메모 용지들을 가지런히 꽂아둘 수 있는 네 개의 기다란 도서관 색인용 카드 보관함과 같은 모양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가 침상 가장자리에 걸린 채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했다. 나한텐 저것들만큼이나 소중한 게 따로 없지. 그가 생각을 이어갔다. 약 3천 장에 달하는 가로 6인치 세로 4인치의 메모 용지들이 쏟아져 온통 바닥에 흩어지게 된다면?
…
파이드로스가 제대로 된 크기의 종이를 사용하기보다는 메모 용지를 사용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는데, 이를 담아놓는 메모 용지 보관함이 한결 더 편리하게 원하는 메모 용지에 접근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었다. 정보에 대한 쉬운 접근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임의적인 재배열이 가능한 작은 묶음 단위로 정리해놓는 경우, 이를 어쩔 수 없어 순차적으로 배열해 정리해놓는 것보다 한결 더 가치 있는 것이 된다.
카드 보관함을 추가해서 시스템을 개편해보려는 시점에 관련된 카드가 ‘날 좀 보소’하며 모습을 드러낸 게 재밌네. 이걸 이를테면 이런 ‘계시’로 받아들여도 될까. 카드를 계속 쌓고 만지고 뒤적이면 지혜와 아이디어를 계속 주겠다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