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속에서 싸우고 있는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해. 이 뉴스레터를 한동안 지켜보신 분들은 아실테지만, 문구(文具)에 대한 글을 종종 썼어. 요즘은 거의 안 썼는데, 마지막으로 쓴 것이 지난 4월 12일의 450호네. 문구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다기보다는 압축되었다고 할까. 이제는 만년필과 종이(노트) 외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게다가 지금 가지고 있는 만년필들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이상 갖고 싶은 만년필이 없어. ‘이 만년필만은 꼭 써보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만년필을 갖고 난 후부터 그런 것 같아. 종이도 ‘이만한 종이가 없네’라는 생각이 든 이후에는 (여러 번 언급한) ‘MD 노트 코튼’만 쓰고 있어. 그래서 결과적으로 더 이상 문구에 대한 탐색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가 되었네.
나는 문구를 사랑한 것인가, 소비를 사랑한 것인가?
이렇게 ‘현타’가 찾아온 후에 생각을 해봤지. 나는 문구를 사랑한 것인가, 소비를 사랑한 것인가? 문구가 매력적인 이유는 많겠지. 예쁜 디자인에,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생활 속에서 쓸 수 있고, 비교적 저렴한 가격 들도 그 이유일 거야.
그런데 언젠가부터 사놓기만 하고 쓰지 않는 문구들이 늘어나더라. 나는 수집가는 아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문구가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거든. 만년필도 오랫동안 안 쓰고 있는 것이 있으면 계속 신경이 쓰여서 몇 자라도 끄적여 줘야 마음이 편해져.
문구 매니아들 많지. 그 분들 취향을 존중해. 이 팍팍한 세상에서 그 정도의 즐거움은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데, (나도 예전에 그런 것처럼) 인스타그램 같은 SNS 등에 자신이 구입한 문구의 사진 등을 계속 올리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문구들을 과연 다 사용하고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겼어. 사실 이건 문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인터넷 환경, 소셜미디어의 문제일 거야.
무엇보다 기록 자체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디지털 도구를 사용해도 되는 거 아닐까?
많은 문구 매니아, 문구 브랜드를 운영하는 분들이 문구의 가치를 대부분 ‘기록’에서 찾더라. 그럼 나는 기대를 하고 계속 읽어보게 되지. ‘자, 그럼 기록을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요?’라는 궁금함을 가지고. 그런데 그 의문은 대부분 해소가 안 되거나 ‘일기를 썼을 때 좋은 점’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
그럼 이런 생각이 들지. 무엇보다 기록 자체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디지털 도구를 사용해도 되는 거 아닐까? 꼭 예쁜 아날로그 문구여야 할까? (아날로그 방식이 뇌의 학습과 기억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에 대한 연구 결과가 있지만, 상대적으로 디지털만의 장점도 있기 때문에 여기서 그것은 논외로 하고.)
쉽게 나올 수 있는 반론은 ‘아날로그 감성을 느낄 수 있다’는 걸 거야. 부정할 수 없지. 내게도 만년필의 필감은 중요하니까. 이제 여기서 대립하는 게 있어. 그럼 기록을 위해서 쓰는 것인가, 아날로그 감성을 느끼기 위해 문구를 쓰는 것인가?
내가 죽을 때쯤 끝까지 내 곁에 남는 문구는 어떤 것일지 궁금해진다.
가장 만족스런 결론은, 기록 행위와 아날로그 감성이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더 나은 과정과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겠지. 나도 만년필이 잘 써질 때는 평소보다 노트 한 두 장 정도는 즐겁게 더 쓸 수 있으니까. 가끔은 기록이 먼저인지 필감이 먼저인지 헷갈릴 때가 있을 정도로.
조금씩 정리되고 있는 생각으로는, 문구의 목적이 기록이라면 기록을 중심으로 중요성을 정해야 한다는 거야. 디지털 문구와 아날로그 문구가 충돌할 때는 내가 판단한 중요성에 따라 어느 하나(또는 메인과 서브)를 선택하고, 중요성 주변에 떠도는 장식들은 걷어내는 방식으로 말이야.
좋은 문구를 쓰고는 싶지만 도구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은 게 현재의 심경이야. 그래서 새 문구는 판드시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만 구입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에 손때를 묻히며 사용가치를 높여보려고 해. 문구 소개를 하더라도 오래(최소 6개월 이상?) 사용했던 것 위주로 해 볼 생각이고.
내가 죽을 때쯤 끝까지 내 곁에 남는 문구는 어떤 것일지 궁금해진다.
비교적 저렴한 취미활동이라고 저도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쟁여둔 반려문구가 꽤 많이 있네요. ㅎㅎㅎ 애정하는만큼 더 열심히 써줘야 할 것 같습니다. ^^
여러모로 공감이 많이 가는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