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서울공예박물관의 상설전시 〈장인, 세상을 이롭게 하다〉를 보고 왔어. 코로나 방역 시기에는 예약을 해야만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제는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네. 게다가 무료.
‘장인’의 의미, 손으로 직접 만든다는 것, 예술작품이 아닌 생활 속 물건, 한 생애를 통해 기술뿐만이 아니라 함께 전수되는 뭔가가 있다는 점, 경영과 운영의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는 점 등 평소의 궁금증과 연결되는 면이 있어서 가보게 됐어. 물론 집에서 가까워서인 것도 있음.🥹
일단, 전시는 매우 훌륭해. 기회가 되면 관람해 보는 걸 추천해. 바로 옆 전시실에서 진행중인 〈나전장의 도안실: 그림으로 보는 나전〉(7월 23일까지)까지 함께 보면 더 만족스러운 관람이 될거야.
전시를 보며 대단한 유물, 작품들이 많아서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나중에 도록(뒤에서 좀 더 얘기)을 사고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어. 그래도 몇 가지만 소개하면,
순금에 보물의 기가 어려
반달 모양으로 새긴 노리개를 만들었다네
시집올 때 시어른들이 주시니
붉은 비단 치마에 달고 다녔지
오늘 길 떠나는 그대에게 드리오니
부디 그대여 여러 패물들 중 하나로 여겨
길에 버리셔도 아깝지 않으나
새 여인 허리띠에만은 맺어주지 마세요
— 난설헌 허초희, 《난설재집蘭雪齋集》 중
두 전시를 다 보고 ‘박물관가게’에서 전시 도록과 기념품 하나(참새, 방앗간 방문)를 샀는데, 지금 ‘2023 공예주간’이라고 50% 할인 받았어.🤭
집에 와서 도록을 넘겨 보니 내가 지금까지 본 도록 중에 가장 훌륭하더라. 유물, 작품들의 도판(사진)이 모두 340개나 실려 있어. 사진도 사진이지만, 전시에는 간략히 붙어있던 설명들이 도록에는 충분히 실려있다보니 작품에 대해 궁금했던 점들을 해소할 수 있겠어.
서울공예박물관 유튜브 채널에 이 전시를 소개한 ‘온라인 전시투어’도 있어.
그리고, 전시품 중에 ‘계영배戒盈杯’라는 특이한 잔이 있었어.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차는 것을 경계하는 술잔’으로 “사이펀의 원리가 적용되어 술잔이 가득차면 관을 통해 잔 받침으로 흘러내”린다고 해. 술욕심에 너무 가득 채우면 술잔이 비어버리는 거지. 관련 영상도 있어.
그리고, 《하재일기》라는, “조선 왕실에 도자기를 납품하던 분원공소分院貢所의 공인貢人이었던 지규식池圭植이 1891년부터 1911년까지 약 20년 7개월 동안 쓴 일기” 중 한 구절이 기억에 남더라.
내가 종일토록 (나인에게) 애걸하였으나 도무지 들어주지 않고 기어코 며칠 안으로 (그릇을) 바치라고 하니, 나는 몹시 분함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칼자루를 쥔 자와 칼날을 쥔 자의 형편이 같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 《하재일기》 1891년 11월 9일
허난설헌의 시, 하재일기에 명품들까지 잘 보았네!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가구나 도구들을 볼 때도 그렇고, 흙집이나 초가집을 볼 때도 그렇고, 나는 살아보지도 않고 사용해보지도 않았지만, 꼭 살아봤었고 사용해봤던 것만 같은 느낌이 들면서... 저 깊숙한 기억 어딘가에서 어떤 장면이 떠오를 듯 말 듯... 하면서, 내게 전생이 있었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곤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