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얘기했던 캐롤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를 띄엄띄엄 읽었어.
정말 오랜만에 읽어보는 에세이집이네. 외국인(미국) 여성이 삼사십 대 시기에 쓴 글을 읽자니 머리로는 알겠지만 가슴으로 공감하긴 힘든 부분이 많았어. 내가 더 젊었을 때 읽었다면 다르게 느꼈을 것 같긴 해.
이런 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어. 한 편의 글마다 눈에 띄게 반짝이는 통찰과 문장들이 있으나 그것을 지탱하기 위해 지루하게까지 느껴지는 일상적인 묘사와 단상들이 항상 더 많다는 거야. 만약 그 둘을 분리해 놓는다면? 모두 제대로 서있지 못하겠지.
형편 없는 책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야. 내 딸이 이십 대가 되면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책이기는 해. 가령,
고립은 — 고립되고 싶은 충동은 — 두려움과 자기 보호에 관련된 일이다. 고립은 고치를 만드는 것, 매혹적으로 편한 나머지 벗어나기가 어려워지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고립은 고독과는 무관하다.
…
‘네 삶에 다른 사람들은 별로 필요 없어, 너도 알잖아. 넌 혼자로도 완벽하게 괜찮아.’ 이것은 자족감으로 가장한 두려움의 목소리, 독립성으로 가장한 고립의 충동이다.
— ‘혼자 있는 시간’ 중
과 같은 통찰은 내 스스로도 시달리고 고민했던 문제에 대한, 공감할 수 있는 규정이야.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 문제이기도 하지. 너무 늦게, 몇 십년 쯤 뒤에 도착한 편지 같은 느낌이랄까.
하나 더 인용해볼까.
대체로 그런 감각은 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환상이랄까 희망이랄까 하는 것과 관련된 듯하다. 행복이 외부적인 것에서 오리라는 환상, 내 바깥의 무언가가 — 새 직장, 새 관계, 새 장소가 — 내 안의 구멍을 채워줌으로써 나 스스로는 만들어내지 못하는 듯한 완전함의 감각을 제공해주리라는 환상이다.
— ‘내가 살 곳을 정하다’ 중
2020년에 한국어판을 출간해서 지금까지 14쇄를 찍었으니 꽤 많이 팔린 책이네. 확실히 에세이류가 출판 시장에서 인기 높은 카테고리이긴 한가 봐. 그런데 손이 잘 안가는 이유는 생각의 밀도, 문장의 긴장감 같은 것들이 ‘내가’ 원하는 수준과 다르기 때문인데, 이것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사실 가장 못 견디겠는 건 맥락, 근거, 뜬금 없이 튀어나오는 자기선언 같은, 아포리즘을 흉내낸 사이비 통찰들이야. 공감을 강요하는.
결국 좋은 에세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건,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있는 의미들을 얼마나 매번 성실히 길어올리고 드러내고 정갈한 언어에 담아내려고 했는지가 아닐까 싶네.
이 책은 잘 나뒀다가 딸이 이십 대가 될 때쯤 줘야겠어. 몇 년 안 남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