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새로 장만한 만년필들을 소개해 볼까 해. 만년필 구입을 자제해 보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은 어느 정도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얼마 전에도 정말 예쁜 걸 주문했었는데, 이게 과연 내게 필요한 만년필인가, 자주 쓸 것 같은가라는 나 자신의 🧑🏻⚖️’엄격한 기준’을 통과하지 못해서 주문을 취소했어. 말이 길다.
오늘 소개할 건 두 자루인데, 첫 번째는 세일러 프로페셔널기어(프로기어) 21K 골드. 다들 알다시피 세일러는 파이롯트, 플래티넘과 함께 일본 3대 만년필 브랜드 중 하나지. 프로기어 21K는 F (fine) 굵기의 닙(펜촉) 제품을 이미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필감과 잉크 흐름이 가능한가 싶을 정도의 펜이야. 하나 아쉬웠던 점은 일본 만년필들이 알파벳 필기에 맞춰진 서구의 만년필들과 비교했을 때 같은 굵기의 F라고 해도 더 가늘게 나오는 편이라 바늘 끝으로 쓰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 가늘게 나오는 펜을 좋아하던 시기에는 그게 만족스러웠는데 이제는 굵게 쓰는 편을 좋아하다보니 손이 잘 안 가게 되었지.
그럴 때 해결책은? 더 굵은 펜을 구하는 거지. 그래서 이번에 같은 모델의 M (Medium) 닙을 샀어. 처음 써 본 느낌은… 역시 실망시키지 않네. 일본 만년필들이 대단한 점은 21K 골드 닙을 장착한 모델을 이런 가격에 판다는 거야. 다른 대부분의 만년필 브랜드들은 스틸 닙에서 14K 닙으로 교체만 해도 20만원 이상이 추가되는데 말이야. 디자인은 머리 속에 떠오르는 🖋그 ‘만년필’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지만 몇십 년이 지나도 싫증나지 않을 디자인이지. 몽블랑 팬들은 뭐라 할지 모르겠지만, 아내에게 준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146보다 모든 면에서 더 만족스럽네. 가격은 세 배 차이가 나는 데 말이야. 그래서 만년필 입문자들은 일본 만년필로 시작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두 번째는 오로라 옵티마 칼레이도스코피오 루체 베르데.🙄 오로라의 대표 모델 중 하나인 옵티마 계열이야. 이탈리아어로 칼레이도스코피오(caleidoscopio)는 ‘만화경’, 루체(luce, 펜숍들은 이걸 다 ‘루스’라고 썼던데?)는 ‘빛’, 베르데(verde)는 ‘녹색’이란 뜻이지. 빛깔과 무늬가 참 예쁘지?
이 모델부터 생긴 변화가 있는데 필기할 때 잡는 그립 부분까지 몸체(배럴)와 같은 오롤로이드로 만들었다는 거야. 이전 모델들은 그냥 검은색이었어. 어떻게 보면 큰 차이지.
오로라가 시리즈 이름은 참 잘 짓는 것 같아. 좀 미안한 얘기지만 배럴의 오롤로이드 디자인 패턴은 컬러 말고는 그렇게 큰 차이(물론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가 안 느껴지는데 시리즈명들은 컨셉 잡고 어쩜 그렇게 거창하게 잘 짓는지.😏 뭐 새로운 모델을 계속 내놔야 하니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오로라, 정확히는 한국 수입유통사가 한때는 한국에서 판매가 잘 되니까 가격을 두 배 가까이 올린 적이 있었는데, 이제 정신을 차렸는지 가격이 안정된 것 같네. 내가 15년 전쯤에 첫 프리랜서 월급으로 오로라 옵티마 블랙 레진(31호 참고)을 샀을 때 가격이 47만원이었는데 지금은 50만원 정도에 팔고 있으니 말이야.
노트 필기할 때 펜을 바꿔 가면서 쓰는 편인데, 요즘은 이 베르데로 가장 많이 쓰고 있어. 사실 18K 닙 등 사양은 가지고 있는 옵티마 366과 같지만, 그만큼 맘에 든다는 거지. 이제 올해 만년필 쇼핑은 이걸로 마무리할까 해.
영롱하구만!
거기다 잘 써지기까지 하면 미치지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