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반 친구 한 명이 항상 🖋만년필로 필기를 했어. 당시에 흔한 일은 아니었지. 대부분은 흔한 모나미 153 볼펜을 쓸 때였으니까. 파이로트 만년필이었는데, 그 친구는 글씨도 참 예뻤고, 만년필을 자기 손의 일부 같이 자유자재로 다뤘어. 아마도 만년필이란 물건이 나에게는 멀게 느껴졌기 때문에 더 대단해 보였던 것 같아.
나도 그런 게 하나 갖고 싶어서 용돈을 모아 종각 옆에 있는 한국 '빠이롯드'에 가서 그 친구가 쓰는 것과 같은 만년필을 찾았지만 없었어. 예산에 맞춰 하나 사긴 했는데 디자인도 영 맘에 들지 않았고 글씨도 예쁘게 써지지 않고 불편하기만 해서 처박아 두고 잊었지.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친구 것은 일본 제품이었고, 한국 빠이롯드는 자체 생산이었으니 같은 모델이 없었던 것 같아. 그 이후로는, 다른 문구들은 좋아했지만 만년필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었어.
그러다 선생님께 공부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만년필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났지. 공부를 시작하고 처음 산 만년필이 펠리칸 M405였어. 이것도 당시 내 주머니 사정으로는 싼 물건이 아니었는데 만족스럽지 않았어. 14K 닙이고 '고시 만년필'이라고도 불리는 대중적인 모델이었는데, 역시 만년필에 익숙치도 않고 길도 들지 않은 상태여서 필체가 더 못생겨지니까 손에 잘 안 쥐게 되었지. 만년필은 볼펜이나 수성펜보다 획이 굵게 나오면서 잉크가 일반 종이에서는 번지고 뒷면에도 많이 비치니까(그래서 노트 종이에도 까다롭게 굴게 되지)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거든. 그래서 만년필 입문자에게는 EF 같이 가늘게 나오는 닙이나 일본 3대 브랜드(파이로트, 플래티넘, 세일러)의 가성비 좋은 만년필을 권하고 싶어.
한편,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를 시작했을 때였어. 을지로에 있는 회사에서 몇 달 간 일을 했는데 직장생활 할 때보다는 벌이가 괜찮더군. 그래서 큰맘 먹고 첫 번째 월급을 받고 만원 짜리를 잔뜩 뽑아서는 근처 명동지하상가에 있는 만년필 전문점에 가서 오로라 옵티마 골드 블랙 레진(977-N)을 그야말로, 질.렀.지. 당시에는 5만원권도 없어서 마흔 일곱 장을 세서 주는데 손이 좀 떨리더라. 그래서 실수로 십 만원을 덜 세서 줬더니 주인 아저씨가 너무 좋아서 흥분하신 것 같다고...😓
사실상 내 첫 만년필은 이것으로 보고 있어. '아, 이게 만년필 쓰는 맛이구나'라는 것을 처음 알게 해줬으니까. 이때부터 본격적인 만년필 사랑이 시작되었는데, 펜의 아름다움도 한몫 하지만 이 모델, 브랜드는 필기감이 어떤 느낌일까하는 궁금증도 만만치 않아. 한정판 모으기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어. 맘에 들어서 샀는데 그게 한정판인 경우는 많지만. 그리고 브랜드마다 워낙 한정판 마케팅을 많이 하다보니 큰 매력을 못 느끼기도 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오로라 만년필 중 옵티마 계열은 두 개가 더 있는데, 프리마베라(이탈리아어로 '봄')와 옵티마 365 모델이야. 기본 형태는 모두 같지만 색깔, 디테일, 닙의 종류가 다르지. 모두 만족하면서 쓰고 있는 펜들이야. 사실 쳐다만보고 있어도 좋은 부분이 있지.
수집보다는 실사용이 목적인 입장에서 요즘은 구입을 자제하려고 하는데 가끔 '이건 정말 사야 해' 싶은 만년필이 나오면 참기가 힘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