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도구에 대한 의식의 흐름
난 현실 정리는 잘 못하는 편인데, 디지털 정리는 즐기는 거 같아.
디지털 정리?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계획을 정리한다든가… 이해가 가는 사람도 있고 안 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회사 일을 할 때도 업무용 프로그램으로 일 정리하는 걸 즐길 때가 있어. 그럴 때는 문득 내가 일을 좋아하는 건가, 이 도구 쓰는 걸 재밌어하는 건가 헷갈릴 때가 많네.
어떤 프로그램들을 주로 쓰나?
요즘은, 디지털 업계에서는 다들 써봤을 컨플루언스(Confluence), 지라(Jira)를 오랜만에 신나게 쓰고 있지. 좀 더 나은 방법을 찾아서 깔끔하게 딱 정리한 후에 사람들에게 공유하면 성취감이랄까 그런 것도 느껴지고.
그게 일을 잘하는 거라고 생각해?
내용 없이 겉보기만 멀끔하다고 일 잘하는 건 아니겠지. 어렸을 때는 극단적이다보니(그게 멋인줄 알았다) 겉보기, 형식 그런 거 다 쓸데 없다! 남들이 못하는 생각, 내용만 있으면 그게 제일이다!…라고 생각했으나 그건 아니더라고. 그 형식도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접점, 인터페이스, 더 넓게는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역시나 중요한 것이었어. 그걸 깨닫는데 오래 걸렸다. 깨닫고 나서도 형식마저 남들이 안 하는 독특한 것을 찾았으나 그것 역시 공감 받지 못하고 실패한 인터페이스가 될 때가 많았지.
대중의 취향을 따라가는 것, 아부하는 것, 설득하는 것, 인터페이스나 프로토콜을 맞추는 것, 자신의 세계를 일부 포기하는 것, 아집을 버리는 것, 좋게좋게 사는 것, 절대 포기하지 않는 어떤 것 등등등… 표현에 따라 맞아보이기도 하고 틀려보이기도 하고 그러네.
지금 생각은 이래.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설득해야 한다. 설득은 내 뜻을 100% 관철하는 것이 아니다. 협상을 할 수밖에 없다. 내가 더 많이 가질 수도 더 많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설득한다면 최소한 내 것이 0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설득을 더 잘 한다면 더 많이 가져올 수 있겠지? 그 설득에 한 가지 원칙이 있다면, 정직하게 하겠다는 것.
설득을 잘 한다는 건 자신의 뜻을 잘 밀어부친다는 뜻일까? 이른바 추진력 있는 사람?
뭐 그런 사람도 필요하겠지. 어떤 상황에서도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사람. 회사 같은 조직에서는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많이 앉기도 하고. 그런데 난 그런 사람들이 되게 아슬아슬해 보여. 넘지 말아야 할 선 위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거 같거든. 당장 그 회사에서는 잘 나갈 수 있어도, 그 사람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그건 좋은 삶이었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이 죽었을 때 다른 사람들도 마음 속에 그런 사망기사를 써줄까?
나는 사이코패스 외에는 사람을 선인, 악인으로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해. 다들 자기가 처한 환경에 따라 착해지기도 악해지기도 하는 것 같애. 그래서 그 환경을 제대로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보고. 소시오패스들도 자기가 날뛸 수 없는 곳이라는 걸 알면 조용히 숨 죽이고 살겠지.
내 생각도 그래. 그래서 선함을 향하려는 사람들이 설득을 더 잘 할 수 있으면 좋겠어. 악함의 수사학을 간파해서 깨부수고, 선함의 수사학을 구축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졌으면 해.
(이제는 누가 말할 차례인지 헷갈린다.) 컨플루언스 얘기하다가 왜 이런 얘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회사에서의 업무는 정직함을 기반으로 하고, 정확하고 설득력 있게 디자인 된 문서와 대화를 최우선으로 하자고. 업무 도구는 이것들을 도와주는 것이고. 그래도 여전히 도구는 무시하면 안 된다고 봐.
그래도 도구가 너를 잡아먹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어떤 도구에 능숙해지면 내 뜻이 아닌 도구의 뜻에 따라 움직일 때가 있더라. 항상 일정한 문서양식에 의미 없는 단어들을 능숙하고 예쁘게 채워넣으면 일을 잘하는 것처럼 느껴지듯이 말이야.
그래, 정신 바짝 차리고 살게.
주말 잘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