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테크놀로지는 새로운 스토리텔링이 필요한가?’를 읽고
〈뉴요커(The New Yorker)〉 6월 15일자 기사인 ‘테크놀로지는 새로운 스토리텔링이 필요한가?(Does Tech Need a New Narrative?)’를 이제 다 읽었어. 기사는 4,215단어로 꽤 긴 편인데, 요지는 이래.
앤드리슨이 2011년에 썼던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어치우고 있는 이유(Why Software Is Eating the World)’라는 글이 실리콘밸리뿐만 아니라 열성적인 전달자들에 의해 전세계에 퍼졌었어.
앤드리슨은 이런 영향력을 자신의 사업에도 활용하고 있는데, 벤처 캐피탈 창업 초기부터 당시 기술업계에서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초기 마케팅의 중요성을 알고 파트너로 전문가를 영입까지 한 사람이라는 거.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어치우고 있는 이유’ 이후에 디스럽션, 공유경제, 플랫폼, 이노베이션, 스타트업 같은 용어들이 힘을 얻으며 태스크래빗이나 우버 같은 회사가 사실은 기술 회사가 아니라는 것은 중요해지지 않았어 — 문화권력까지 장악하게 된 거지.
그런데 이제는 저 "Eating" 스토리텔링이 현재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해 진거야. 약발이 다 한거지. 문화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스토리텔링이 필요해져서, 앤드리슨은 2020년 4월에 ’이제는 창조할 시간(IT’S TIME TO BUILD)’이라는 글을 내놓았어.
이제 블로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아예 〈Future〉라는 독자적인 미디어를 내놓았어. 앤드리슨이 서브스택(Subtack), 클럽하우스(Clubhouse) 같은 미디어 스타트업에 투자해 영향력을 유지해 온 건 공공연한 사실이지.
〈Future〉의 필진들은 대부분 앤드리슨과 사업적인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고, 표방하는 바는 기술적 낙관주의라고 해. 기술을 이용하면 뭐든지 할 수 있고,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경제적 거품'까지도 옹호한다고 하네. 실리콘밸리와 그들의 방식을 신화화 하는데 또 기여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 돼.
기사에서 과학기술학자인 부르노 라투르를 인용해서 반가웠는데,
비평가는 폭로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으는 사람입니다. 비평가는 순진한 신봉자의 발 아래 놓인 깔개를 들어 올리는 사람이 아니라 참가자들이 모일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하는 사람입니다.
이 내용을 인용한 이유는 기술에 대한 비평이 비판적인 폭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인데, 〈Future〉 같은 기술적 낙관주의자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기사는 이렇게 마무리 해.
존재론적으로 (어쩌면 병적으로) 미래를 향한 산업의 경우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고, 그래야만 합니다. 부와 정치 권력의 네트워크를 통해 또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실리콘밸리의 기업가와 투자자는 실제로 투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기관과 빛나는 기능적 인프라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업데이트 된 수사(rhetoric) 속에서, 벤처 투자 기업이 항상 미래의 은행, 의료 시스템, 학교, 우편 시스템 및 신문을 상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기 쉽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다소 성공적이었으며 때로는 파괴적이었습니다. “(앤드리슨의) 빌딩”은 새로운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충분히 새롭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실리콘밸리의 권력자들은 기술뿐 아니라 기술을 둘러싼 담론까지도 본인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서 전세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그걸 날것 그대로 경쟁적으로 수입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도 있고 말이야.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반성을 해야하는 부분이 있어. 사실 그런 문제에 대한 백신으로 지금 《감시 자본주의 시대》 같은 책을 읽고 있기도 하고.
기사에서 인용한 자료 중 읽어보고 싶은 것들.
Sara M. Watson, Toward a Constructive Technology Criticism, 2016.
Sam Harnett, Words Matter: How Tech Media Helped Write Gig Companies into Existence,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