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1 그 세계에서 저주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정보라, 《저주토끼》 (2017, 2023, 2025)
뉴스레터를 쓰기 위해 빈 화면을 열면, 무엇을 읽었는지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 까맣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럴 땐 잠자코 의자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고 맥락없이 변기에 세제를 뿌려 솔질을 하고 샤워기로 물을 뿌린다. 하얘진 도기를 보면 조금 기분이 좋아진다.
물론 이런 행동을 한다고 해서 갑자기 뭘 쓸지 생각이 난다거나 하진 않는다. 무엇보다 가장 도움이 되는 건 책을 읽으며 쓴 카드다. 《저주토끼》를 읽으며 뭘 메모했는지 보자. 생각이 한참 멀리 갈 때도 있어서 이 책에 관한 내용만 있는 건 아니다.
“후광효과? 문학상 받은 책들은 걱정할 것이 없을 듯.”
“'해설'이나 '평론'이 붙어있지 않다는 것이 흥미롭다.”
“'다른' 개연성. 일반 소설과는 다른, 세계관 구축의 단계도 없이.”
정보라 작가의 또 다른 단편집 《너의 유토피아》가 '필립 K. 딕상' 최종후보에 올랐다고 하길래 SF(과학소설) 작가인 줄만 알고 있었으나, 그건 큰 오해였다. 이 책은 작가의 말 대로 "환상호러 단편집"이다. '인공 반려자'가 등장하는 〈안녕, 내 사랑〉은 SF에 속할 수도 있겠으나 그 이야기 역시 ‘본성’은 호러이다.
2023년에 쓴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작품들은 "교훈이나 가르침보다는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장르"인 "대중문학"에 속한다는 분명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대중문학'은 '순수문학'과 대비해 쓴 용어인 것 같으나, 요즘 소설 중 '대중소설' 아닌 소설이 얼마나 있는지는 의문이다.
한 가지 재밌는 점은, 얇은 단편소설집에도 항상 뒤에 따라붙는 해설이나 평론이 이 책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건 작가나 출판사가 원하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대중문학'에는 그런 관례가 없어서였을까? 다음에 읽을 《너의 유토피아》에도 반 페이지 정도의 짧은 추천사 말고는 없는 것으로 보아, 평론가의 해설 유무가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을 구별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허튼 생각을 했다.
《저주토끼》, 정보라(지음), 래빗홀, 2025(10만 부 기념 리미티드 에디션)
이 책은 열 개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2017년에 처음 출간되었고, 2022년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며 2023년에 개정판이 나왔고, 올해 이 '10만 부 기념 리미티드 에디션'이 나왔다.
장르 문학은 《삼체》 이후 꽤 오랜만에, 특히 단편은 정말 오랜만에 읽으며 당황했다. SF, 판타지, 호러 등의 장르물은 독자가 그 세계관에 몰입할 수 있는 과정과 시간을 줄 것이라 예상했지만 단편에 그런 여유나 배려는 없었다. 무작정 눈앞에 들이대는 '다른' 개연성의 낯선 세계를 '받아들이거나 떠나거나' 선택해야 했다.
(이 책과 상관없이) 각종 문학상을 받은 책은 '후광효과'1덕에 비판 받을 가능성이 크게 줄어들 것 같다. 독자들은 작품에 불만이 있더라도 '전문가들이 문학상까지 준 작품이니, 내가 이해하지 못한 뭔가가 있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유명한 상일수록 작가는 안심한다’는 가설?
《저주토끼》에 묶인 열 편 모두가 걸작이라고 할 수는 없다. 평이하며 지루하기까지 한 것도 있다. 어느 부분은 스타일의 아름다움이나 유려함을 논하기 이전에, 스토리를 서술하기에 급급하다고 느껴진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것들은 단편 장르 문학의 문법에 미처 적응하지 못한 내 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장르 안에서의 서로의 약속, 호흡, 신호 등에 아직 빠져들지 못한.
열 편 중 〈저주토끼〉, 〈몸하다〉, 〈덫〉, 〈흉터〉는 인상적이다. 범람하는 각종 영상물에서도 보기 힘든 새로운 상상력이다. 작가에게 대물림과 전염은 중요한 테마인 것 같다. 저주나 고통은 자기 대에서 끝나는 법이 없고, 가족과 가까운 이들에게 유전되고 전염된다. 이 점에서 대표작은 〈저주토끼〉일 수밖에 없다.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 용품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가업으로 만든 물건을 개인적인 저주에 사용해서도 안 된다. — 〈저주토끼〉 중 (10)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를 넘어 10만 부가 팔린다는 것은 여러 요인이 작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많은 요인들 중 그의 이야기 자체의 매력은 무엇인지, 많은 사람들이 매료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번달에는 정보라 작가의 책을 여러 권 읽으며 그 궁금증을 해소해 보려고 한다. 다음 책은 《너의 유토피아》이다.
— 〈노상기록〉 62호 (2025.9.1)
"어떤 대상을 평가할 때에, 그 대상의 어느 한 측면의 특질이 다른 특질들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일. 인물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외모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을 경우 그 사람의 지능이나 성격 등도 좋게 평가하는 일 따위이다." — 표준국어대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