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7 최신 한국 소설을 읽어보자
조지 오웰, 《좋건 싫건, 나의 시대》 (2025)
《좋건 싫건, 나의 시대》, 조지 오웰(지음), 안병률(옮김), 북인더갭, 2025
조지 오웰이라면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손에 꼽히는 작가 아닐까 싶다. 그만큼 그의 책들도 많이 출간되어 있다. 아직도 번역되지 않고 남아 있는 글들이 있을까 싶었는데, 있었다. 《좋건 싫건, 나의 시대》는 절반 정도는 에세이, 나머지 절반은 서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의 에세이집 중 아직 번역되지 않은 글들, 번역되었으나 절판 등으로 접하기 어려운 글들을 모은 책이다.
이 책에 실린 모든 글은 조지 오웰이 잡지 등의 매체에 기고한 글이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분량이 짧고 쉽게 읽힌다. 담백하고 직선적인 문체 덕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여러 번 곱씹으며 음미할 만한 글이 많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통찰과 날카로운 비평이 빛을 잃은 것은 아니다.
그 중 내게 의미 있게 다가온 글은 〈소설을 변호하며〉이다. 이 글은 1936년 《뉴 잉글리시 위클리》에 기고한 글로, 소설들에 대한 '주례사비평'이 소설마저 경멸하게 만드는 당시 현실, 그리고 그런 주례사비평이 난무할 수밖에 없는 출판 시장의 생리를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한다.
문제는 소설이 존재하지 못하도록 외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생각 있는 사람들에게 왜 "절대 소설을 읽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주례사를 쓰는 평론가들의 혐오스런 추천사 때문이라는 대답을 흔히 듣는다. (…) 지난주 《선데이 타임스》에 실린 한 문장을 보자.
"이 책을 읽고 기쁨에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그 영혼은 죽은 것이다." (13)
지금도 대부분의 책에 실리는 추천사들은 책을 읽지도 않고 쓰거나 출판사에서 써주는 경우도 있고, 물론 그에 대한 금전적 대가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직간접적인 뇌물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모든 소설은 언급될 가치가 있다"는 말이 난무하는 한 좋은 소설 비평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15).
모든 소설은 좋다는 가정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서평자는 형용사의 사다리를 타고 끝없이 올라간다. (…) 나쁜 책을 좋은 책으로 둔갑시키는 원죄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갈 길이 없다. (17)
이 글이 내 어떤 부분을 자극했는지 모르겠지만 현시점의 한국 소설들을 제대로 읽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한강의 책은 너무 쉬운 선택이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 어떤 소설이 내 분명치 않은 기대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찾아봤다. 그러나 그건 너무 힘든 일이었는데 오웰의 말처럼, 나쁜 책은 하나도 없었고 모두 '걸작'이며 '문제작'이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내가 읽어본 적이 있거나 허명(虛名)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소설가의 최근작 두 권, 이기호의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과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를 골랐다. (소설은 역시 다른 분야의 책보다 판매량이 많다보니 책값이 상대적으로 싸다. 페이지 수와는 상관이 없다.)
내가 소설을 읽지 않게 된 것은 소설에 너무 많은 걸 요구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인생의 '진리' 단 몇 조각이라도 슬쩍 보여주길 원했다. 그러나 이제 그건 무리한 요구였으며 소설에게 그럴 의무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썩 좋은 이야기를 원할 뿐이다. 그 좋은 이야기에서 진리든 의미든 뭐든 찾는 것은 독자의 몫이든 의지이든 자유이든 할테니 말이다.
소설가는 근본적으로 이야기꾼이며 아주 좋은 이야기꾼(가령 트롤럽, 찰스 리드, 서머싯 몸 같은)들이 꼭 협소한 의미에서 '지식인'일 필요는 없다. (19)
이 욕구가 차게 식기 전에 빨리 읽고 싶은데 책은 아직 오는 중.
— 〈노상기록〉 51호(2025.8.4)






최근 불편했던 광고 문구는 왜 불편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