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의 장인들 1》에는 물통, 칼, 염색, 다다미, 미장 장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최상의 재료를 구하는 것이다. 이 '최상'의 기준은 물건이 쓰이는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통을 만드는 장인은, 삼나무는 향이 너무 강해서 밥통보다는 술그릇에 적합하기 때문에 대신 화백나무를 선택한다. 미장 장인은 다실(茶室) 벽의 미장을, 찻물을 끓인 수증기가 백 년 쯤 벽에 닿아 주물 주전자의 녹물 같은 검정으로 벽의 색깔이 변하게 만들 흙을 숙고와 실험을 거듭한 후 고른다.
만드는 과정은 의식 속에서 이미지를 고안하고 그 설계도를 재료에 투영해 물질화하는 작업이 아니다. 즉 물질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실제로 물질을 '움직이고 흐르고 변화하는 물질'로 만나고 이 물질의 흐름을 따라간다. 물질의 속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재료 자체와 함께 나타난다. — 《팀 잉골드》, 77
전각 돌에 글자를 새길 때도, 무엇을 새길지 결정한 후 돌의 크기, 모양, 종류를 고르고 그에 맞는 최선의 설계를 한다. 당연히 설계대로 돌에 옮겨지지 않는다. 돌의 출생지에 따라 특성도 제각각이다. 같은 곳에서 온 돌도 각양각생이며 급이 나눠진다.
전각도로 살짝 누르기만 해도 들어갈 정도로 무르거나, 칼을 쥔 손이 아플 정도로 단단하거나, 옆의 선을 침범할 정도로 잘 터지거나, 잡석이 섞여있거나, 발견하지 못했던 실금이 가있거나 한다. 눈으로만 봐서는 어떤 돌인지 알 수 없다. 칼을 넣어봐야만 그 돌의 정체가 드러난다.
"생성 중인 물질(substances-in-becoming)로서 재료는 한때 부여되었던 형식적 목표를 끊임없이 넘어선다. 현재 특정한 형태로 주조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재료는 항상 이미 다른 것이 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으며 이미 진행 중인 역사성을 지닌다."(Barad, 2003: 821) (…) '물질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은 인간의 행위와 재료 사이의 끊임없는 '조응' 과정이다. — 《팀 잉골드》, 77-78
돌의 정체가 드러나고 특성을 파악하면 나는 그에 맞춰 칼을 움직여야 한다. 힘이 너무 과하거나 부족하면 설계한 대로 옮길 수 없다. 그렇게 최선을 다하더라도 돌이 다른 방향으로 칼을 이끌 때가 있다. 그럼 돌이 슬쩍 보여준 그 길로 방향을 바꾼다. 이 작은 변화 때문에 처음 설계와는 다른 결과물로 완성된다. 아마도 장인이라는 존재는 재료와의 대화와 타협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최대한 많이 관철시키는 자가 아닌가 싶다.
"장인의 솜씨란 한 치에 달렸나니." — 《에도의 장인들 1》, 200
"한 치", 즉 약 3cm는 관대하다. '한 푼', 3mm도 안 되는 차이에 달려있기도 하니까 말이다.
어렸을 땐 프라모델 조립을 — 그 당시 문방구만 떠올려봐도 다들 그랬던 것 같다 — 꽤 좋아했었지만, 중학생 시절 이후로는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일을 하지 않은 것 같다. 학생일 때는 어쩔 수 없었더라도, 그 이후에 손을 써 뭔가를 만들어내는 걸 배웠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이제와서 전각 덕분에 하곤 한다. 작은 재료 안에서 내 의도를 드러내는 과정은 매번 새로운 경험이다. 직업으로 삼고 안 삼고의 문제가 아니다.
아마추어는 말 그대로, 전문가처럼 경력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 주제를 향한 애정으로, 이끌림과 자율적 참여와 책임감이라는 동기로 연구한다. 아마추어는 조응자들correspondents이다. 그들은 연구를 하면서 세계 전체의 삶의 방식과 조화를 이루는 자기 삶의 방식을 찾는다. (…) 아마추어는 자신의 삶 전체를 연구 대상에 바치기로 선택했기에 대상의 부름에 응답하고, 응답에 대한 책임을 지는 더 유연하면서도 공감에 기반한 접근 방식을 찾는다. — 《조응》, 37-39
나는 손으로 글을 쓸 때는 철자를 잘 틀리지 않지만, 키보드로 쓸 때는 자주 틀린다. 이는 서툴고 적응을 못한 내 손가락이 계속 자판을 잘못 누르는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내 손이 단어들을 별개 글자들의 나열이 아닌 연속해 흘러가는 몸짓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필기한 선은 주의를 기울이고 감정을 담아 정성껏 쓰는 바로 그 몸짓에서 나와 종이 위에 펼쳐진다. — 《조응》, 319
책을 읽은 후 종이카드에 만년필로 내용을 정리하고, 그 카드들을 뒤적이며 뉴스레터를 써서 보낸다.
돌에 새기고 싶은 문구를 발견하면 가장 맘에 드는 서체를 골라 노트에 설계한 후 어울리는 돌을 골라 점을 찍듯 선을 새긴다.
요즘 하는 일의 전부인 것 같다.
— 〈노상기록〉 45호(2025.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