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4 첫 몇 문단이면 충분하다
존 제레마이아 설리번, 《펄프헤드》 (2023)
비가 오니 그나마 날씨가 좀 선선해졌군요.
오늘 보내드리는 레터는 〈노상기록〉 42호(2025.7.11)로 보낸 글입니다. 뉴스레터를 쓰다보니 자연스럽게 ‘좋은 글쓰기’에 관해서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 ‘글쓰기’에는 쓰는 사람, 읽는 사람, 전달 매체, 검색, 링크 등도 함께 얽힙니다.
《펄프헤드》를 쓴 존 제레마이아 설리번은 주로 잡지 같은 대중매체에 글을 기고하는 작가라는 면에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그의 글은 ‘뉴저널리즘’ 스타일로 평가되는데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뉴 저널리즘’은 "미국의 각종 잡지 지면에서 가장 주된 표현 양식으로 자리 잡았"고, "영미 문학에서 '에세이'라는 이름을 달고 출판되는 글들의 상당수가 (…) 대개 이런 스타일로 쓰여 일차적으로 잡지에 게재되는 순서를 거친다"(559)고 합니다.
짧게 말하면, 설리번은 글은 매우 재밌으면서 지적이라는 겁니다. 저도 이런 글을 쓰고 싶네요.
— 서울외계인
글을 잘 쓰려고 할 때마다 결국 진부해지는 수백만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보통 좋다고 하는 글을 흉내내면 내 글도 그럴듯해질 것 같다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생겨나는 착각 때문이다.
내가 충격을 받는 글들은 대부분 '글을 이렇게 써도 되는 거였어?' 내지는 '이런 글을 써도 되는 거였어?'하고 멍하게 만드는 글들이다. 당연하겠지만, 거의 전세계에서 유일한 사례를 들어 소개하고는 '너도 이 사람처럼 할 수 있어'라는 결론으로 여지없이 이어지는 글을 읽고 '글을 이렇게 써도 되는 거였어?'하고 받는 충격과는 다르다.
나와는 다른 차원의 꽤 많은 구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한 뉴스레터는, 좋은 글이나 기사를 소개한다는 명분으로 내용을 요약하고 거기서 매번 '자기계발적 메시지’를 뽑아내는데, 이제는 제목만 봐도 어떤 내용일지 알 것 같다. 사업적 감각이란 것은 자전거 타기처럼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매번 느낀다. 사업가들의 공통점은 아직 실현되지 않는 미래 가치를 현재로 가져와 마치 실현될 또는 실현된 것처럼 말한다는 것인데, 사기꾼과의 차이점은 스스로 얼마나 진심으로 믿느냐인 것 같다. 그런데 49%를 믿는 것과 51%를 믿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또 그 믿음이 자기최면으로 바뀔 때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다른 사람이 속아주지 않으면 나 자신이라도 속여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책과 별 상관없는 얘기를 늘어놨다.
《펄프헤드》, 존 제러마이아 설리번(지음), 고영범(옮김), 알마, 2023
John Jeremiah Sullivan, Pulphead: Essays (2011)
글은 이해하기 쉽게 써야한다고들 한다. 그런데 쉬운 글이 심지어 재밌고, 지적인 자극까지 함께 준다면? 이런 글쓰기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진지하게 글을 쓰는 사람들은 영혼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끼는 맥북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쓴 존 제레마이아 설리번은 주로 미국의 유명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작가이다. 이 책은 설리번이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엮어 놓았는데, 왜 '펄프헤드', 즉 '대중 잡지 애호가'라는 제목을 붙였는지 알 수 있다.
이 설리번이 바로 그 쉬우면서도 재밌고 지적인 글을 쓰는 작가다.
그의 글 스타일에 관해서는 '옮긴이의 말'을 참고해보자.
우선, 사실에 기반하되 사건을 설명하는 대신 장면을 구성해서 보여준다든가 하는 식으로 극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구성 방식을 사용하고, 신문기사 등에서는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하는 세부적인 묘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또한 인물의 행위는 물론이고 '생각'을 묘사하고, 필자가 이야기 속에 등장하고, 때론 개입하기도 한다. 게다가 명확한 플롯을 구성하고 인물들 간의 대화도 그대로 가지고 오고, 첨예한 의견 대립을 낳을 가능성이 있는 관점을 도입하는 것 또한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글인데도 어조도 다양하고, 저자의 개인적인 시선이 강하게 개입하기도 하고, 이야기의 속도감 역시 에피소드마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되, 일반적인 기사에 비해서는 대체로 차근차근하고 완만한 편이다. (556-557)
생각나는 책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 바로 《사실의 수명》이다. 그 책에서도 팩트보다 서사를 우선하는 작가와 그 사실을 지적하다 회의를 느끼는 편집자가 등장한다. 그 작가 역시 이런 스타일의 기사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논픽션의 기본을 유지하되 다양한 소설적인 기법들을 채택한 이런 방식의 글은 저널리즘 역사 속에서의 독특한 위치 때문에 '뉴 저널리즘'(new journalism)이라고 불린다"(557). 이 경향의 주요 작가 중에는 이전에 읽었던 조앤 디디온이 있다.
이 뉴 저널리즘은 "기사의 객관성이 훼손되고, 그 결과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미국 사회가 매카시즘과 베트남 전쟁을 거치며 "그때의 '객관성'은 진실을 전달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진실을 효과적으로 감추는 방편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라는 반성을 불러왔다. "'진실성'과 '객관성'이 반드시 같이 움직이는 건 아니라는 주장"이 힘을 얻으며, 미국 "기자협의회 1996년 윤리강령에서 '객관성' 항목이 '공정성'과 '정확성' 같은 것들도 대체되"었다.
이제는 "'뉴 저널리즘'이 미국의 각종 잡지 지면에서 가장 주된 표현 양식으로 자리 잡았"고, "영미 문학에서 '에세이'라는 이름을 달고 출판되는 글들의 상당수가 (…) 대개 이런 스타일로 쓰여 일차적으로 잡지에 게재되는 순서를 거친다"(559)고 한다. 국내에 소개되는 외국 에세이, 특히 미국 작가들의 에세이에서 감지되는 어떤 공통점 그리고 같은 장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인 한국 에세이들과의 차이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매우 다양하지만, 미국 남부인으로서의 (희미한) 정체성, 음악에 대한 사랑(이상의 것), 매우 유연하지만 절대 넘지않는 선 같은 감각 등이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 사실 책의 첫 몇 문단만 읽고 설리번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국내에는 이 책 한 권만 번역되어 있다. 2023년 8월에 출간되었음에도 얼마 전 구입한 나도 1쇄를 읽고 있는 걸 보면 많이 팔리지는 않았나보다.
어디선가 설리번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를 함께 상찬하는 글을 보고 설리번을 알게 됐다. 월리스의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은 몇 번 읽어보려고 시도했지만 많이 읽지는 못 했다. 어떤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그 책을 살 때보다 더 큰 확신이 필요한데 — 그래서 책들이 쌓이는 거겠지만 — 월리스의 책도 다시 시도해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