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보내드리는 글은 〈노상기록〉 32호(2025.6.16)입니다.
SF 작가로 유명한 스타니스와프 렘의 책을 처음 읽었습니다. 그의 많은 작품 중 이 책은 과학소설로 분류하기도, 그렇다고 전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 경계를 확장한 책으로 읽었습니다.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닙니다만, 글을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써도 되는구나를 새롭게 알게 됐네요. 그래서 좀 객기를 부려 흉내 내보려고 했습니다.
《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 스타니스와프 렘(지음), 정보라(옮김), 현대문학, 2025
Stanisław Lem, Doskonaļa Próżnia(1971) & Wielkość Urojona(1973)
"《상상된 위대함》은 (…) 존재하지 않는 책들의 서문을 모은 책"('옮긴이의 말', 444)이며, "예고편"(339)이기도 하다. 과학소설(SF)이 미래에 대한 예고편들이라면 이 책 역시 과학소설이다.
창의성 전문가들이 조언하는 방법 중 하나가 전혀 연관성이 없는 둘을 연결시켜 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성냥과 작약꽃, 연필깎이와 부처상, 벽지와 GPS 같이 말이다. 그럼 인간의 뇌는 그 "의미의 공백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1을테니까 말이다.
그야말로 우연히도,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상상된 위대함》은, 2052년에 데뷔하여 예기능(예능 기획 인조지능)이 기획한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대중의 관심을 끌고, 그것에 힘입어 그 다음해에는 순선능(순위 선정 인조지능)에 의해 537개의 아이돌 그룹 중 톱5에 선정된 그룹의 한 멤버가, 힘들 때마다 읽는 책이라고 소개하며 초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리고는 그 다음해, 즉 2054년에 시행된 제3762차 교육과정 개편에서 교육의 대중성과 직업 선택의 형평성을 고려한 교능(교육 인조지능)의 계획 수립을 통해 이 책은 '인능(인간지능) 창의성' 교과서로 채택된다.
이 결정은 교육 전문가나 수험생, 학부모 모두에게 큰 반론 없이 받아들여졌는데, 오래전부터 이 방식이 가장 공정한 결과를 산출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또는 자신들이 이미 읽은 책이어서 추가적인 집중력을 투여할 필요가 없다는 계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앞서 말한 '이질적인 둘을 연결하라'는 조언을 뛰어넘는다. 제대로 된 조언을 위해서 '이질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확장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연결 대상을 '둘'로 한정하는 것은 저자 렘, 더 나아가 인능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말을 공식적인 기록으로 주석에 남겨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서문'이라는 형식과 의미의 전복(顚覆)인가? 그건 단순히 위아래가 뒤집힌다는 것 아닌가? 역시 부족한데, 이 책은 수정(受精)을 위해 의미가 내려앉으려는 우주를 교체한다. 남아있는 것은 단지 우리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기표로서의 언어뿐이다. 이미 알고 있던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미 죽어버렸다.
순선능과의 협업을 통한 교능의 결정은 현명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결정을 발표하기 전 이미 정영평능(정치적영향평가 인조지능)과의 협의를 마쳤기 때문에 인능의 반대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이 교육과정이 실제 교육 현장에서 실행된 뒤 약 72시간 후면 성공 또는 실패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성공으로 판별된다면 제2762차 교육과정은 168시간 더 실행될 것이고, 실패로 판별될 경우에는 제2763차 교육과정이 한 시간 안에 수립된 후 발표되고 실행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인능은 그 발표를 기다리지 않고, “미퓨터(미래학컴퓨터) 1만 8,000대가 수행한 무인간적이며 그러므로 무오류한 작업의 결과”(426)인 “6만 5,760개”의 항목을 참고한다.
앞으로 일어날 역사에 대한 정보, 즉 보편적인 ‘앞으로’에 대해, 우주경제학적·우주정치학적·우주수학적 사안들에 대해, 갑자기 사라질 모든 것에 대해, 어떤 목적으로 어떤 위치에서 그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데이터를 포함하여, 그리고 과학과 기술의 새롭고 위대한 성과와 그중 어떤 것이 여러분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위협적일지에 대한 상세사항도 함께, 미래종교학 항목에 수록된 종교와 신앙의 진화에 대해, 그 외 다른 주제와 항목 6만 5,760개
— 〈베스트란드 엑스텔로페디아〉 중, 427
오혁진, 《만화 형식의 역사》 (2022), 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