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보내드리는 글은 〈노상기록〉 24호(2025.6.2)입니다.
소설에 관해 쓰는 것은 정말 오랜만인데요, 소설 특히 제발트의 글들은 여러 시도를 해보고 싶네요. 그래서 오늘 제발트의 다른 책 몇 권을 주문했습니다.
기쁜 날입니다.
토성의 고리는 적도 둘레를 원형궤도에 따라 공전하는 얼음결정과, 짐작건대 유성체의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도 과거에는 토성의 달이었던 것이 행성에 너무 가까이 위치하여 그 기조력으로 파괴된 결과 남게 된 파편들인 것으로 짐작된다.(→ 로슈 한계)
— 《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
(작가 인용)
《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지음), 이재영(옮김), 창비, 2019
W. G. Sebald, Die Ringe des Saturn (1995)
이 책의 작가 W. G. 제발트는 1944년에 태어나 2001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한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던 1992년 8월, 다소 방대한 작업을 끝낸 뒤 나는 내 안에 번져가던 공허감에서 벗어나고자 영국 동부의 써퍽주(州)로 도보여행을 떠났다."(10)
(...)
"나의 기록을 끝마치는 오늘은 1995년 4월 13일이다."(343)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써야할까? 이 책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서 그가 산 57년을 동원해야 할까? 만약 그러기로 한다면, 제발트의 성장과정, 삶에서의 중요한 결정과 활동 들, 무엇보다 그의 소설, 에세이 등 모든 작품을 읽은 후에야 이 책에 관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 한 권만으로는 겨우 그의 존재를 확인했을 뿐이다.
분명히 소설로 알고 이 책을 샀지만, 읽어 나갈수록 의심스러웠다. 여행기인가? 또는 에세이인가? 나중에 '옮긴이의 말'을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제발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토성의 고리》에서도 사실과 허구는 교묘하게 착종1되어" 있고, 심지어 제발트의 다른 소설인 "《이민자들》에 등장하는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의 여행수첩 사진은 제발트 자신이 직접 글을 써서 찍은 것이라고 한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글과 관련된 사진은 여느 소설에서는 발견하지 못한, 여행기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기 때문에 더욱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여 넘나드는, 따라하고 싶은 글쓰기다.
제발트의 글은 마치 지적이며 교양 있는 친구와 서로 얼굴은 절대 쳐다보지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 친구의 끊임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어깨를 맞춰 걷는 것 같다. 그 이야기는 지루하지 않고, 지식과 의미로 충만하며, 단어들은 아름답고, 시간은 사라진다. 큰소리는 한 번도 내지 않았다.
누군가의 에세이를 통해 그를 알게 되었으나, 많은 작품이 이미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어 있었다.
소설
《현기증.감정들》
《이민자들》
《토성의 고리》
《아우스터리츠》
에세이, 강연, 인터뷰 등
《자연을 따라. 기초시》
《전원에 머문 날들》
《캄포 산토》
《공중전과 문학》
《기억의 유령》
이 책 《토성의 고리》는 한국어 초판이 2011년에 출간됐고 개정판이 2019년에 나왔으며 내가 산 책은 2024년 5쇄인 것으로 보아, 한국에서도 많이 읽히는 작품인 것 같다. 모든 책을 읽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 읽을 가치가 있음에도 전혀 모른 채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한편으론 우습기도 하다.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으로의 이민을 결심하게 한 "전체의 진보를 내세우는 낙관론 자체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제발트의 태도, 이야기가 품고 있는 비감(悲感), 책 전체에 연결돼 흐르는 은유들 등등 샅샅이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작품이다.
錯綜. 이것저것이 뒤섞여 엉클어짐. (네이버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