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는 올해 1월 20일에 한국어판이 출간되었고, 한 달이 조금 지난 2월 15일에 벌써 4쇄를 찍었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이후 전개된 여러 상황들, 특히 극우세력의 준동을 지켜보며 혹시 이것이 '내전'의 전조는 아닐까하는 불안감의 영향일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나면 한국의 현재 상황은, 법과 상식을 무시하는 한 미치광이의 발악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쇠퇴'라는 전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의 일들은 우리나라에서도 거의 똑같이 일어났다.
수많은 행정 명령을 발동하고 범죄자 친구들을 사면했다. 대통령이 의회와 협의하는 대신 행정 명령으로 통치하는 가운데 미국은 '제왕적 대통령제'로 변모했다. (p.174)
전날 밤 집회에서 그레그 로크 목사는 군중에게 하느님이 '애국자 군대'를 일으키는 중이라고 외쳤다. (p.167)
힘을 얻은 시위대는 마침내 서쪽 편 정문을 부수었다. 원형 홀에 난입한 시위대는 공격 대상의 이름을 연호했다. '펠로시, 슈머, 펜스!' (p.170)
[트럼프는] 지지자들에게 선거 집회를 방해하는 이들과 몸싸움이 벌어지면 자기가 변호사 비용을 대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p.168)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아노크라시, 민주주의 국가의 위기》, 바버라 F. 월터(지음), 유강은(옮김), 열린책들, 2025
Barbara F. Walter, How Civil Wars Start: And How to Stop Them (2022)
이 책의 목적은, 오늘날 미국에서 언제라도 내전이 발발할 수 있음을 이해하기 위해 현대의 내전을 발생시키고 규정하는 조건을 제대로 알고, 내전을 어떻게 중단시킬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p.16)
부제에도 등장하는 '아노크라시'(anocracy)는 "완전한 독재autocracy도, 민주주의democracy도 아닌 중간상태"1를 말한다.
이 체제에서 시민들은 민주적 통치의 일부 — 완전한 투표권 등 — 를 누리지만, 광범위한 권위주의적 권한을 지니고 견제와 균형을 거의 받지 않는 지도자 밑에서 살아간다. (pp.32-33)
이 연구 데이터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수치는 '정치체 점수'(Polity Score)이다. "한 나라가 어떤 해에 얼마나 민주적이거나 독재적인지를 수치화하는 것"으로, 가장 독재적인 나라는 -10점, 가장 민주적인 나라는 +10점으로 총 21단계로 평가한다. 아노크라시는 -5부터 +5점 사이에 해당하고, -1부터 +1점이 가장 위험한 구간이다. (pp.34-35)
현재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는 데이터는 2018년까지이다. 한국의 점수는 아래 그림과 같이 1998년 이후로 계속 8점(민주주의)을 기록하고 있다.
말하고 싶은 내용이 많긴 하지만, 내전의 가능성을 높이는 주요 요인 세 개만 언급하자면 이렇다.
파벌화, 파벌주의
'지위격하' 현상
소셜 미디어
정치적 양극화 때문이 아니라 바로 '파벌화' 때문에 내전 발발 가능성이 높아진다. "시민들이 종족, 종교, 지리적 구분을 바탕으로 집단을 형성하고, 정당들이 약탈적으로 바뀌어 경쟁자를 배제하고 주로 자신과 지지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실행할 때 파벌화가 완성"(p.264)된다.
"한 나라에서 파벌이 초파벌이 되면, 전쟁의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다. "가장 불안한 나라는 사회가 두 개의 지배적 집단으로 분열된 곳"인데, "대개 두 집단 중 한 집단이 인구의 40~60%를 차지"하고 "이런 비율이 무력 충돌로 이어지기 쉽다"고 한다. (p.64)
내전이 폭발한 원인은 기회주의적 지도자들이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공포와 원한을 활용하면서 중무장한 폭력배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집단을 국민들 사이에 풀어놓았기 때문이다. (p.63)
'지위격하'(downgrading) 현상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일단 권력을 잡았다가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이 특히 싸움에 나설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이다. "내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 나라에서 누가 폭력을 개시할지를 예측하는 신뢰할 만한 방법"이다.(p.93)
그래서 저자는 점진적 개혁의 장점을 말한다. "반란이 일어나는 주된 이유는 민주주의 이행이 새로운 승자와 패자를 낳는다는 사실" (p.38)때문이고, "점진적 개혁은 시민들에게 불확실성을 줄여 주고 집권 엘리트들에게 덜 위협이 되면서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품위 있게 권력을 포기할 기회를 제공한다. 그로써 대체로 폭력이 줄어든다"(p.41)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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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미디어는 극단주의자들의 "강력한 신무기"가 되었다. "값싸고 신속하고, 분노와 원한을 불러일으키는 데 더없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소설 미디어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대표적으로는 미얀마 로힝야족 학살에 페이스북을 이용한 선동 사례(2012)가 있다. (p.137) 또, "페이스북, 유튜브, 트위터는 2015년부터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 진출했으며, 이 과정에서 충돌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p.141)
"지구적 차원에서 민주주의가 쇠퇴하는 현상이 인터넷의 등장과 스마트폰의 도입, 광범위한 소셜 미디어의 사용과 밀접한 관련"(p.142)이 있는데, "규제를 받지 않는 개방된 소셜 미디어 플랫폼은 결국 내전으로 이어지는 조건을 부추기는 완벽한 촉매"였다. (p.143)
이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수많은 극단주의자들의 마이크와 지갑 역할을 해주고 있는 유튜브의 어두운 면을 매일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짜 정보를 활용해서 부정선거를 주장하고 최소한 일부 유권자들에게 선거 결과가 뒤집어졌다고 설득하면서 시민들이 선거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 수 있다. (p.151)
소셜 미디어는 종족, 사회, 종교, 지리적 분열을 고조시켜서 파벌 형성의 첫 단계를 개시할 수도 있다. 물론 이는 신화와 감정, 불만의 정치 — 모두 파벌주의를 부추기는 것 — 가 대단히 매력적인 콘텐츠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은 이런 분열적 콘텐츠를 부추긴다.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분리하면서 가치관이나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끝없이 갈라지는 현실로 몰아붙이고 사회를 갈가리 찢어 놓는다. (p.154)
"결국 폭력의 촉매로 작용하는 것은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이고, "알고리즘은 끝없는 위기감을 부추김으로써 절망감을 더욱 키운다." (p.164)
이 밖에도 이 모든 사태를 자신과 파벌의 이익을 위해 주도면밀하게 이끄는 종족 사업가(ethnic entrepreneur), 폭력 충돌 사업가(violent conflict entrepreneur) 등의 개념도 눈여겨볼만하다.
그렇다면, 이 책의 목적 중 하나였던 내전을 어떻게 중단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무엇일까? 아노크라시를 취약하게 만드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특징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p.247)
법치: 법적 절차의 평등하고 공정한 적용
발언권과 책임성: 시민들이 정부를 선택하는 데 참여할 수 있는 정도,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
유능한 정부: 공공 서비스의 질과 행정 조직의 질과 독립성
"거버넌스2가 개선되면 이후에 전쟁이 벌어질 위험성이 줄어든다"고 한다. (p.248)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속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다.
트럼프는 임기 내내 미국 장성들에게 추파를 던졌지만, 장군들은 대통령의 권력 확대 요구를 인정하기보다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가 내세우는 의제와 거리를 두었다. ... 전 국방 장관 열 명이 ... 성명을 발표해서 자신들은 대통령이 아니라 헌법을 수호할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 '합중국 선거 결과를 결정하는 데 군대가 할 역할은 아무것도 없다.' (p.177)
이것만큼은 미국이 참 부러웠다.
미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쓴 책이긴 하지만 그냥 넘길 수 없는 내용이 많다. 한국의 파벌은 어떻게 만들어져 있나, 누가 자신들의 지위 격하를 느끼고 있을까, 이 혼란으로 이익을 챙기는 '사업가'들은 누구인가, 폭력만큼 심각한 소셜 미디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급격한 개혁이 필요하지만 어떤 문제들이 발생할까 등등 많은 질문들이 떠오른다.
다음에 읽을 책은 매기 넬슨의 《아르고호의 선원들》이다.
1974년 노스웨스턴 대학 테드 로버트 거 교수가 전 세계 각국 정부의 민주적 특성과 독재적 특성에 관한 데이터를 수집한 뒤 만들어 낸 신조어. (p.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