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고는, 친한 대학동창들이 모여있는 단체대화방에 "다들 사랑합니다❤️"라고 올렸다('거의' 진심이긴 하다). 반응이 재밌을 거라고 은근 기대는 했으나, 30년 이상 알고 지낸 사이들임에도 예상은 쉽지 않았다. 결과는 이랬다.
냅다 물음표로 의문을 표시하거나('대체 왜?'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묻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사랑한다’고 고백을 받거나, 하트 방구 이모티콘을 날리거나, 이상한 소리 하는 거 보니까 봄이 왔구나라거나, 낮술을 의심하거나, 내란 후유증으로 진단하는 반응들을 보여줬다. 내 예상보다는 훨씬 따뜻한 반응이었다.😘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어느새 인간관계가 고장난 사람들에 관하여》, 맥스 디킨스(지음),이경태(옮김), 창비, 2025
Max Dickins, Billy No-Mates (2022)
이 책의 저자 맥스 디킨스는 영국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작가인 남성이다. 본인의 결혼식 들러리를 정하려고 주변을 살펴보니 자기에게 (남자)친구라고 할만한 사람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대체 '남자들의 우정이란 뭘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결론은? 만족할 만하다.
남자는 영국이나 한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남자들 간의 '농담'에 관해서는 그 유사함에 놀랄 지경이었다. 남자들 간에 아까처럼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어떤 '처벌'을 받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농담은 그 말이 내포하는 감정으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게 만들고, 의미에 모호성을 부여한다." (p.126)
많은 남자들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에 서툴다. (이 부분에서는 세대 차이가 있을 것도 같은데, 아들 녀석이 친구들과 대화하는 것을 들어보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연구에 따르면, 남자 유아는 여자 유아에 비해 감정표현의 범위와 강도에서 모두 높은 수준을 보인다. ... 발달심리학자들의 관찰에 의하면, 남아와 여아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에 성별 차이가 생기기 시작한다고 한다. 즉, 남아는 '남자답게' 여아는 '여자답게' 행동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자신에게 기대되는 성역할을 알아챕니다." (p.107)
내 세대의 남자들이 어렸을 때 많이 들었을 소리: "계집애처럼 질질 짤래?" (p.110)
이것을 시작으로 남자들은 감정 레이더를 상실해가는데, 그 과정은 세 가지 상호작용 단계로 구성된다.
억압: 차분히 감정을 마주하면서 어떤 종류의 감정인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파악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소외: 인간 감정이라는 수레바퀴에서 느끼는 고유한 음색, 맛, 질감에서 점차 유리된다
무감각: 농축액을 희석해 만들어진 것 같은 감정을 느낀다
우리는 부정적 감정뿐만 아니라, 긍정적 감정까지도 짓이겨버린다. 모든 감정을 함께 담긴 멀티팩으로 취급한다. (p.124)
즉, "기쁨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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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농담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농담은 그 말이 내포하는 감정으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게 만들고, 의미에 모호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농담은 또한 상대방 남자들에게서도 부담을 덜어준다. 남자들은 사실, 칭찬을 받는 입장이 되었을 때에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진심어린 애정을 받는 것만큼 남자들이 곤혹스러워하는 상황도 많지 않다. 칭찬을 받아들이는 것은 감정의 통제권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p.126)
칭찬 직후 개그 던지기 같은 "감정의 철회에는 이차적 이점이 존재한다. 바로 권력이다."
우리는 내가 혼자서도 충분한 존재라는 이미지를 유지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한다. 어떤 이가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존재라고 해도, 우리는 이 점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행동한다. (p.127)
유튜브 채널 〈숏박스〉에서 이런 남자들의 모습을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서로에게 다정한 말 따위는 절대 없다. 실제 상황이라면 더 심하겠지만 말이다.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친밀감에 대한 '남성만의' 형식이 있다는데 동의"한다. 그것은 "'활동적'이고 '은밀한' 형태의 친밀함"이며 "너무나 은밀해서 노골적인 적대감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서로를 잔인하게 대할 수도" 있지만 이 "공격성은 친밀감의 반대가 아니라 친밀감을 성취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활용"된다. (p.226)
이건 뭐 흔히 묘사되는 사춘기 남학생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데, 문제는 성인이 되어서도 큰 변화 없이 오히려 "감정 레이더를 상실"해 간다는 것이다. "아직도 많은 남성이 남성성에 대한 전통적 개념에 매달리고"(p.55)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 속 병사들을 그린 전쟁 영화를 떠올린다. 한 병사가 동상과 굶주림, 절망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고 있다. 어떤 전우가 자신의 손을 잡고 "너가 배고픈 거 알아. 그건 부끄러워할 게 아니야.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어."라고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데, 그의 옆엔 텅 빈 통조림통뿐이다. 다른 전우는 자신의 배급식량에서 꺼낸 비스킷 한조각을 무표정하게 건네준다.(p.233)
위의 인용문을 읽었을 때 많은 남성들이 후자의 전우를 칭송할 것이다. '맨박스'(남성의 행동방식을 제한하는 암묵적 규칙) 중에는 '남성은 과묵해야 하고,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츤데레?)는 규칙이 있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친밀감의 한 형태가 될 수 있을까?"
여성에게 대화는 친밀감을 형성하고 보여주는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남성에게 대화의 목적은 많은 경우 정보 교환이나 사교모임의 메인 메뉴인 단체활동을 조직하는 것이다. 남성들은 같은 공간에 모여 관심사를 공유하면서 친밀감을 형성한다. (p.193)
여기서 문제는 "남성 우정의 핵심요소, 즉 공동의 활동"(p.238)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상적인 가정이 공동체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개인주의, 심리과학과 심리치료의 확산, 나르시시즘을 조장하는 소셜미디어들 덕에 "감정표현에 관해 점점 큰 강박"(p.224)을 갖게 되었다.
저자는 이런 많은 문제를 해결하고 '우정'을 되찾았을까? 기쁘게도, 그렇다.
말은 가볍다. 사랑이나 우정은 행동하는 것이다.(p.402)
그는 자신이 얻은 교훈을 이렇게 정리한다.(p.409)
어른이 되어서도 우정을 유지하려면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우정은 의무가 아닌 자발성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특별하다. 즉, 우정은 항상 자발적 선택을 필요로 한다
반대로, 삶이 고단해지면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행동지침까지 제시한다.(p.419)
누군가 도움을 청하면 나타나기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먼저 나타나기
힘들어도 계속 나아가기
저자는 스탠드업 코미디언답게 농담을 잠시도 참지 못한다. 할 수 없이 진지해질 때가 있긴 하지만, 그 순간에도 지하철 화장실 양변기 칸 앞에서 무표정하지만 뭔가를 간신히 참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영국식 농담은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런 표현은 머릿속에서 상상을 해보니 좀 웃겼다.
이탈리아 남자는 날아다니는 벌떼를 착륙시키고 말겠다는 신념을 가진 항공 교통관제사인 양 열정에 가득 차 쉼 없는 손짓을 한다. (p.100)
"중년의 우정은 대부분 관리의 문제"(p.409)라고 하는데, 나는 선택한 우정을 지키기 위해 어떤 관리를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다들 사랑합니다❤️"라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데 말이다.
다음 읽을 책은 아일린 마일스의 《낭비와 베끼기》이다.
중학교 3학년 2학기에 서울로 전학왔는데, 그때부터 절친이 된 친구가 있었다! 우린 서로 "가장 친한 친구"라고 부르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렇게 35년을 가장 친한 친구로 살아가던 어느날, 나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한참을 떠들다가 전화를 끊었는데... 그때 문득 "오늘도 내가 전화했구나! 친구가 나한테 전화한 것이 언제였지?"라는 생각이 떠올랐고, 그로부터 7~8개월 동안 전화하지 않았고, 친구는 과묵한 녀석이라... 전화가 오지도 않았다! 그 7~8개월 뒤에 누가 먼저 전화했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다만, 그 즈음해서 나는 "더 이상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닌 것 같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3~4년이 더 지났고, 우리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1년에 1~2번씩 만나고 있지만, 서로 전화하지는 않는다. 그 녀석과 나는 진짜로 가장 친한 친구였을까? 내 인생에서 미스테리와도 같은 일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그냥 인생에서 있을 수 있는 그저 그런 일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