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탄을 하며 이 책을 읽었다. 치밀한 논증, 폭넓은 사례 인용, 일상에서 발을 떼지 않는 태도 등.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저자 데이비드 헤즈먼드핼시가 기존 이론들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헤즈먼드핼시는 "양가적"(兩價的, '두 가지 이상의 가치나 의미를 지닌')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어떤 이론이나 사건의 한계를 가차없이 비판한 후에는 뼈에 붙은 살을 발라내듯이 긍정적인 가치를 어떻게든 찾아낸다. 이 책의 근본적 목적은 "음악에 대한 비판적 변호를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듯이, 바로 이 "비판적 변호"가 부정적, 긍정적 가치를 함께 찾아내는 저자의 방법론인 것 같다. 이 점은 최근에 다룬 '회복적 읽기'와도 닿아있다.
《음악은 왜 중요할까?: 자유, 연대, 사랑… 사람과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음악의 힘》, 데이비드 헤즈먼드핼시(지음), 최유준(옮김), 오월의봄, 2024
David Hesmondhalgh, Why Music Matters (2013)
이렇게 이 책이 가진 진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음악에 관한 책이라 조금 쉽게 보고 읽기 시작한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면서, 나 자신도 모르고 있던, 내가 음악에 관해 갖고 있던 편견도 함께 드러났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헤즈먼드핼시가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음악이 왜 중요한지 설명"하고, "'대중적인' 음악 형식을 포함한 다양한 장르와 경험을 살피고 들으면서, 음악에 대해 비판적으로 변호"(p.19)하는 것이다.
이 비판적 변호를 전개하는 방식을 각 장으로 나누어 보면, 음악이 왜 중요한지를 "개인적 자아의 층위에서"(2장), "타인들과의 친밀한 관계에서"(3장), "사교성과 '공현존'co-present 공동체의 경험을 구축하고 강화하는 측면에서"(4장), "시공간을 가로질러 연대, 공통성, 공공성의 경험을 쌓는 측면에서"(5장)에서 탐구한다. (p.19)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친절한 책들을 보면 앞의 내용을 수시로 정리해서 상기시켜 준다. 이 책도 그러한데, 저자는 각 장의 내용을 중간중간 다른 관점으로 요약해준다. 1장은 서문 역할을 하고 있고,
2장: 인간의 번영에 기여할 수 있는 음악의 가치를 살펴봄. 특히 음악이 정동적 경험과 맺는 특별한 관계에 집중함
3장: 전후 대중음악에 대한 역사적, 다중텍스트적(multitextual) 논의를 통해 음악의 정동적 힘에 대한 고찰을 친밀한 관계로 확장하고, 사랑과 성의 관련성에 대한 가혹한 비판으로부터 대중음악을 변호함
4장: 공동체를 창출하는 음악의 힘에 대한 비현실적으로 야심 찬 열망에서 비롯된 비평들로부터 음악을 변호함
5장: 복잡하고 고도로 매개된 사회 전반을 아우르며 공현존하는 집단과 지역적 한계를 초월하여 폭넓게 공동체를 만드는 음악의 힘을 살펴봄 (pp.33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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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 경험은 인간의 삶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p.261)는 헤즈먼드핼시의 또 다른 핵심 질문이다. 그래서 당연히 예술, 미학, 사회학, 문화이론 분야의 저명한 학자와 이론 들 — 가령 피에르 부르디외, 테오도어 아도르노, 마사 누스바움 같은 — 이 수없이 등장한다. 읽고 싶었으나 읽지 않은, 그들의 한계 역시 가차없이 비판한 내용을 읽는 것은 이 책의 또다른 즐거움이다. 물론 부정적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살을 취한다.
헤즈먼드핼시의 학문적 뿌리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나의 주장은 문화연구의 특정 버전들로부터 영향받았다. 특히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와 같은 저자들의 저작에서 보이는 '평범한' 노동자계급 경험에 대한 존중이 담긴 시각으로부터 크게 영향받았다"(p.24)며, 레이먼드 윌리엄스를 "문화연구의 최상의 버전"(p.53)으로 올려놓는다. 그리고는 "모든 종류의 대중문화는 우리 자신과 타인의 감정적 삶에 대해 풍부한 성찰을 하게 해준다"며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에 대한 편견을 깨버린다. 그리고 저자의 결론도 이것으로부터 나온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가장 주장하고 싶은 내용으로 내가 예상했던 것은 이것이었다.
세상에 미치는 가장 중요한 음악적 영향은, 숙의를 수반하거나 정치적 투쟁을 진전시키는 공공성의 형식들에 기여한다는 의미에서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연대감과 공동체의 감정을 살아 있게 하는 공적인 사교성의 유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p.29)
'공중'(publics)과 '공공성'(publicness)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이 책의 결론에서 핵심적인 개념인데, 여기서는 두 종류의 공공성으로 나눈다.(p.176)
사교적 공공성: 서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의 사교성(sociability)이라는 측면에서 공공성 이해
숙의적이고 행동주의적인 공공성: 시민권에 기반을 둔 정치공동체의 개념을 통해 공중과 공공성 이해
음악은 첫 번째의 '사교적 공공성'과 더 깊게 연결되어 있다. "음악이 집단적 번영과 맺는 가장 중요하고 가치있는 관계는 정치적 투쟁에 기여함으로써 형성될 수 있다는 주장"은 옳지 않으며, "음악이 숙의적 공공성보다 사교적 공공성을 통해 집단적 번영에 훨씬 더 크게 기여하기 때문"(pp.286-297)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번 탄핵 국면에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대표적인 '투쟁가'로 떠오른 것은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들은 친숙한 노래였기 때문에, 시위 현장에서 서로 전혀 모르는 시민들의 공통성(commonality)을 불러일으켜 연대감, 즉 사교성을 자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물론 노래 가사, 2016년 이화여대 시위에서의 사용 등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시각은 너무 답답한 세계이지만, 곧 우리가 원하는 그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음 읽을 책은 맥스 디킨스의 《남자들은 왜 친구가 없을까》 이다.
덧붙임
결론에 등장하는 '번영'(flourishing)이라는 개념도 중요해서 다루고 싶었지만, 그러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뺐다. 이 개념을 통해 아마르티아 센의 《자유로서의 발전》 (1999)에 등장하는 '역량'(capability)라는 개념도 알게 됐다. 간략히 옮겨보면, 좋은 삶을 평가할 때 마음의 상태(행복, 즐거움 등)보다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중요하고, '발전'의 목표는 그러한 사람들의 '역량' 발휘를 위한 것(pp.45-47)이라는 내용이다. 이 책도 읽어봐야겠다.
이 밖에도 눈이 번쩍 뜨이는 개념들로는 공통성, 시민 민족주의(civic nationalism), 대항공중, 역량접근법 등이 있다.
선생님 글씨체가 예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