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___ )는 사이비 말이며 동시에 사이비 침묵이다. (p.205)
예를 들면, 주변 세계가 나치적일 때에는 나치적인 것이 인간에게 주어지는데, 그것은 그 인간이 양심의 행위를 통해서 나치즘에 대한 결단을 내리는 일이 없이 일어난다. 인간은 완전히 ( ___ )의 일부가 되어 자신에게 어떤 것이 주어져도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p.209)
독재자의 외침과 독재자의 슬로건, 그것이 바로 ( ___ )가 기다리는 것이다. 독재자의 외침과 그 명확함, ( ___ )와 그 불분명함이 서로 호응한다. ... 이 독재자의 슬로건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오직 소리 높음과 명확함뿐이다. (p.215)
문제: ( ___ ) 안에 들어갈 단어는 다음 중 무엇일까요?
① 유튜브 ② 인공지능(AI) ③ 가짜뉴스 ④ 잡음어(雜音語) ⑤ 탈진실
《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지음), 최승자(옮김), 까치, 2010
이 책은 '침묵'이라는 존재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 "침묵은 인간의 근본 구조에 속"하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침묵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책의 시작부터 저자 막스 피카르트(1888~1965)가 규정하기 시작하는 침묵의 의미가 내 ‘침묵’의 수용 한도를 초과했고, 나는 책 후반쯤의 '잡음어'(雜音語)(pp.198~227)에 주목했다.
오늘날 말은 말과 동시에 침묵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활동을 통해서 침묵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말, 다른 어떤 말의 잡음으로부터 생기고 있다. ... 항시 잡음어로부터 말 같은 것이 생기고, 항시 잡음어 속으로 말 같은 것이 사라진다. ... 말은 더 이상 정신으로서 존재하지 않고 다만 음향적 잡음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정신에서 물질에로의 변형이며, 정신인 말의 물질인 잡음어로의 변형이다. (p.198)
피카르트는, '침묵이 있어야만 말을 통해 진리가 드러난다'고, '침묵이 용서와 사랑을 위한 자연적인 토대'라고 했으나, 현대는 이미 잡음어의 시대인 것 같다.
이 전체적인 잡음 속에서는 더 이상 말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고, 다만 그 음향학적 운동만이 중요해지며, 모든 것이 잡음에 뒤덮이게 되어, 평준화된다. 시인의 말도, 그 어떤 인간의 잡담도 모든 것이 그 한 가지 잡음 속에 가라앉아버린다. (p.225)
다시 말해, 우리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개소리(성대모사가 아니라)마저 빠짐없이 전해주는 미디어들 덕에, 잡음어에 360도 포위되어 매일을 살고 있다. 그 속에서 ‘말’은 묻혀버리고 사라진다.
그렇다면, 그 탈출구로서 바로 ‘침묵’을 떠올려야 하는 걸까?
가브리엘 마르셀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이 책에서 찬양하는 침묵은 "일체의 지성을 초월하는 평화" 바로 그것이다. (p.13)
남은 얘기로,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동양의 도가(道家), 특히 노자의 《도덕경》을 떠올리기도 하나보다. 다양한 해석은 좋은 일이지만, 나는 다만 '현(玄)'자가 궁금했다. 그렇다. 《천자문》을 시작하는 ‘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의 그 ‘현’이다.
이 자는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 사전을 찾아보니 21개의 의미가 있다.
특히 '고요하다'는 의미도 있다는 것이 ‘침묵’과 연결되어 흥미로웠다.
다음 읽을 책은 데이비드 헤즈먼드핼시의 《음악은 왜 중요할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