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로서의 인류학자》를 읽다가 마주친 용어가 있어. '고급통속화'라는 말로, 프랑스어 'haute vulgarisation'를 번역한 것이고, '오뜨 불가리자시옹'이라고 읽어. 역자주에 따르면 "어려운 주제를 일반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소개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고 해.
책에는 "고급통속화된 [프랑스] 제3공화국의 대중문화는..."(p.50)이라고 나와 있어서 '프랑스 제3공화국'(1870~1940)에 관해 궁금해서 찾아봤지(네이버 지식백과 《프랑스사》와 위키백과. 책은 무엇이 좋을지 몰라서). 프랑스 역사에는 중요한 시기로 보여.
제3공화정의 '1875년 헌법(l'amendement Wallon)'의 특징은 '삼권 분립'의 기초 위에서 대통령과 내각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의회의 권한을 최대한으로 확대한 데 있음
이 헌법에서 최초로 의원 내각제가 명문화되어 행정권과 관리 임면권이 이 내각에서 위임됨
1879년부터는 공화주의자들이 재기하고, 왕당파가 몰락하면서 '마르세예즈'가 프랑스 국가로 결정되고, 정부가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옮겼으며 대혁명 기념일인 7월 14일이 국경일이 되었음
프리메이슨이며, 실증주의, 반성직자인 온건한 공화주의자 쥘 페리(Jules Ferry) 교육부 장관은 교육이 권력의 중요한 근원임을 인식하여 교육 분야에 정치력을 집중하여, 교육이라는 토대 위에 공화적이고, 세속적인 프랑스를 수립하고자 했음
즉, 가톨릭 교회로부터 교육 통제권을 탈환하여 사회적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대신 공화주의적 정치 체제와 사고 방식을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것
그리하여 의무, 세속, 무상의 초등 교육이 공화주의의 미덕과 시민의 임무, 애국 사상을 널리 보급시켰음
제3공화정은 그것을 무너뜨리려는 우익들의 음모로 여러 차례 위험한 고비를 넘겼음: 블랑제 사건, 파나마 운하 사건, 드레퓌스 사건 등
— 《프랑스사》 중
이러한 환경에서 고급통속화가 출현했다는 것인데, 납득이 가네.
현대는 고급통속화의 시대지. 문화 영역에서 일반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살아남기 힘들잖아. 당연히 어려운 것을 쉽게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핵심을 유지하며 전달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각광 받고 있고. 귀한 능력이며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능력 같아.
문제는, 어려운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고작 표면적으로 '느낀 것’을 말하면서 쉽게 설명했다고 포장하는 것이지. 이 길을 선택한 사람들은 포장과 (또한 포장된) 각종 직함에 자신감이 있는 것 같아. 해당 영역에 입문하고 싶은 일반 대중은 압도적인 마케팅과 마주할 경우 이런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경우가 많고.
나도 회사 다니면서 그런 짓을 많이 했는데, 디지털 분야에서 일하다보니 변화의 속도가 빨라서 어떤 기술, 트렌드를 완전히 파악하기도 전에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어. 그러다 나중에는 뭔가 발표나 교육을 해야할 때는 새로운 것을 다뤄야 한다는 고정관념까지 생겼지.
하지만 자신이 오랜 시간 익히며 숙고한 지식을 바탕으로 해도 부족할 판에 설익은 지식을 가지고 누군가를 설득하는 일은 하면 안 된다는 걸 여러 번 느꼈어. 너무 늦게 깨달았나? 반면, 내가 좋아하고 오랜 시간 들여다 본 것에 대한 설명은 긴장하지 않고 즐겁게,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떠드는 나를 발견하곤 했지.
결국, 시간과 노력은 적게 들이고 돈은 많이 벌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닌가? 하지만 가만 보면 쉽게 보이는 것이 항상 더 비싼 법이지. 장인의 손길처럼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