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를 계속 따라다니고 있는 키워드(이거 너무 자주 얘기해서 이름이라도 붙여야겠어) 중 ‘낭만주의’를 공부하기로 했어. 이유는, 내가 어렸을 때(아마도 고등학생~대학생 시기)부터 낭만주의적 사고에 경도되어 있었다는 걸 최근에 발견하고 나름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랄까. 문학 작품이나 대중 매체의 영향이었을 거라고 추측해볼 뿐.
선생님께서 낭만주의 공부의 시작으로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을 추천해주셨고, 그에 대한 서평이 있는 김진혁, 《신학의 영토들》을 참고하라고 하셨어. 마침 〈강유원의 책담화〉에서 다루셨더라고.
우선 머리말과 《종교론》을 다룬 제1부 1장 ‘근대 세계에 일어난 신학의 인간학적 전환’만 읽고 정리 했어. 《종교론》을 읽기 전 슐라이어마허와 저서에 대한 충분한 배경 지식, 맥락을 알게 된 것 같아 좋네. 역시 👾지식정원에 카드 정리해서 올려놨으니 참고하시길.
사실 가톨릭 세례를 받았음에도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 현실 교회의 모습 탓이 크고 기독교 교리들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지. 그런데 슐라이어마허가 제시한 신학은 어쩌면 내가 기독교를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것과 닿아있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게 하네.
원래 (몇 주째) 이번 주의 책은 《뉴 로맨틱 사이보그》였으나 이 책도 낭만주의가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낭만주의에 대해 공부한 다음에 읽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었어. 그래서 《종교론》이 새치기하는 걸로 계획 변경.
종교의 본질은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다. 종교는 우주를 직관하려 하며 우주의 고유한 서술과 행위 속에서 그에게 경건히 귀 기울여 들으려 하고 스스로 어린아이의 수동성으로 우주의 직접적인 영향에 사로잡히고 충만하게 채워질 수 있으려고 한다. ... 종교는 다른 모든 개별자와 유한자 가운데서 무한자를 보는 것에 못지않게 인간 속에서 무한자를 보며 그 각인된 흔적과 그 연출을 본다.
— 《종교론》,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