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를 포함한 AI 기술에 관해서는 변화에 대한 상식 확보 차원에서 관련 자료들을 보고 있어. 위협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무시할 수가 없네.
동료가 캡처한 이미지를 메신저로 보내줬는데,
1941년생이면 올해로 82세이신데 저런 지적 호기심과 새로운 기술에 대한 수용적 태도, 사무실까지 찾아가는 적극성이라니 대단하고, 배울 게 많을 분 같아. 볼펜 색깔들로 보아 한 번만 읽으신 게 아닌 게야.
위에 등장한 기사는 오늘 링크하려던 〈시사IN〉 810호 커버스토리 중 하나야.
〈시사IN〉 810호 커버스토리 - 더 이상 미래가 아니다 (2023.3.28)
아직 나도 다 꼼꼼히 읽진 못했는데, 수학적, 공학적 내용이 포함된 기사가 있어서 만만치가 않네. 그러나 어렵더라도 논의가 꼭 필요한 주제를, 대중성을 핑계로 피해가지 않고 다양한 측면을 취재하고 인터뷰했어. 전자책은 판매하고 있지 않아서 종이판으로 주문해 스크랩해놓을까 생각중. 이슈가 있을 때마다 이름값에 올라타 한몫(돈이든 유명세든) 챙기려고 급히 찍어낸 관련 책들보다 훨씬 나으니까.
관심 있는 주제를 다룰 때마다 사보는 〈기획회의〉 최신호에서도 챗GPT를 커버스토리로 다뤘어. 매체 특성상 창작자 관점에서 쓴 글이 많아.
〈기획회의〉 581호 - 챗GPT의 시대: ① 생성하는 AI,창작하는 인간 (2023.4.5)
AI를 문학 기계로 작동시키는 조건들
창작도구로서의 AI, 도구인가 반칙인가
ChatGPT에게 저널리즘을 맡길 수 없는 이유
멀티에서 싱글로, 싱글에서 멀티로, 그리고 AI로
내가 채굴한 문장, ‘봄날의 빛은 너였다’
기계를 통해 돌아오는 작가의 영혼
〈시사IN〉에 비해 참고할 내용이 많진 않으나, 이정환 기자의 ‘ChatGPT에게 저널리즘을 맡길 수 없는 이유’와 “내가 채굴한 문장, ‘봄날의 빛은 너였다’”는 추천. 다양한 장르(게임, 웹소설 등)에 있는 창작자들의 생각을 들어볼 수 있었다는 것은 긍정적.
<인 디즈 타임스>의 노동 전문 기자 해밀턴 놀란이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저널리즘이 될 수 없다고 규정11)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AI가 만든 복제품이 충분히 그럴듯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저널리즘에 필요한 책임감이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사람은 늘 실수를 하기 마련이지만 실수에 책임을 진다. 기사가 잘못 나가면 정정 보도를 하고 평판에 큰 타격을 받는다. ChatGPT는 인간을 흉내내지만 저널리즘의 윤리에 대한 어떤 가이드라인도 따르지 않는다.
— ‘ChatGPT에게 저널리즘을 맡길 수 없는 이유’ 중
현재의 거대 언어 모델이 맥락과 뉘앙스를 조절하는 질문자의 질문 능력 안에서 그 잠재성을 펼쳐낸다는 사실과 창작에 들이는 시간을 줄여 더 고차원적인 추상화 노력에 쏟도록 여유를 준다는 점은 결국 우리 시대의 새로운 예술이 기계에 의해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이양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텍스트에서 이미지로, 이미지에서 텍스트로, 텍스트에서 사운드로 이어지는 멀티 모달리티(Multi Modality)의 횡단 능력은 기존의 매체적 구분으로 형성된 예술 장르가 실은 하나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 “내가 채굴한 문장, ‘봄날의 빛은 너였다’” 중
여담으로… 아직 표기방식이 통일 안 돼서 챗GPT, ChatGPT, 챗지피티 등으로 쓰네.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챗지티피’가 맞는 것 같은데, 내 눈에는 ‘챗GPT’가 가장 자연스러워 보여.
나만 무섭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