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무수히 많은 만년필이 있지만 딱 둘로 나눌 수도 있는데, 스틸 펜촉 만년필과 골드 펜촉 만년필이야. 써 본 경험으로는 18K 골드 촉은 필기감도 상당히 좋고 잉크에 따라서는 부식에도 강하다고 해. 그만큼 ‘만년필’이라는 이름의 의미에 더 어울리는 소재지. 그만큼 가격도 더 비싸고.
그래서 나도 예산이 허락하는 선에서는 골드 촉을 선호하고 스틸 촉 만년필을 살 경우에는 다른 요소들 — 디자인, 평판, 사용목적 등 — 때문에 사지. 클래식을 지향하지 않다보니 디자인이 독특하고, 사람들이 그렇게 좋다고 하니 한 번 써볼까 하는 마음도 생기고, 가격이 저렴한 편이니 휴대하고 다니며 회사에서 쓰기도 부담 없어. 그래도 내 머리 속 만년필 등급은 ‘골드 펜촉 〉〉〉 스틸 펜촉’이 확실히 박혀 있다고나 할까.
그런데 작년부터 올해까지 이 고정관념을 수정하게 된 계기들이 있었는데, 첫 번째가 레오나르도 모멘토 제로이고 두 번째가 카웨코 스포트 브라스 때문이었어.
물론 필기감은 손에 쥐어지는 펜 굵기, 잡는 위치에 따른 균형, 사용하는 잉크의 흐름이나 점도, 종이 재질, 개인 취향 등 다양한 요소에 영향 받는 주관적 영역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평가는 어렵지.
그래도 주관적으로 평가해 보자면 저 두 펜은 골드 촉이 전혀 아쉽지 않을 정도의 필기감을 느끼게 해줬어. 여기서 한 가지 재밌는 점은 펜촉을 직접 만드는 만년필 회사는 세계적으로 약 12개 정도밖에 없다는 거야. 대부분의 브랜드들은 요보(Jowo), 복(Bock) 등의 펜촉 전문 제조사에 OEM 방식으로 공급 받고 있어. 오로라보다 몇 년 앞선, 이탈리아 최초의 만년필 브랜드로 자부하는 몬테그라파 같은 브랜드도 포함해서 말이야.
만년필 회사에서 어느 부분까지 세밀하게 펜촉을 설계해 주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보면 그런 브랜드들의 필기감 차이를 따지는 건 별 의미가 없을 수 있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런데 앞에서 얘기한 레오나르도, 카웨코 두 펜은 골드 촉이 생각나지 않게 만들 정도의 필기감을 느끼게 해줬어.
레오나르도는 현재의 만년필 브랜드 중에서는 전통과 현대적 실용성을 가장 잘 조화시킨 펜을 내놓고 있다고 생각 돼. 디자인은 클래식 만년필의 아름다움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기능성과 디테일에서는 기존 명품 브랜드들을 넘어서고 있다고 봐. 그 균형을 너무 잘 맞추고 있지.
카웨코는 실용성, 휴대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지금 회사에 가지고 다니며 쓰는 스포트 브라스 모델은 참 만족스러워. 안정적이면서 부드럽게 흐르는 스틸 촉은 물론이고, 황동이라는 소재에서 오는 묵직함 때문에 뚜껑을 펜 뒤에 끼워서(포스팅) 쓸 때 균형이 뒤로 쏠릴 수도 있는데 펜을 쥐는 위치를 잘 조정하면 펜촉을 묵직하게 눌러줘서 슬슬 쉽게 쓸 수 있기도 해. 사무실에서 쓰다보면 종종 떨어뜨리는 경우가 있는데 황동이니 내구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이제 스틸 펜촉 만년필이라고 무시하지 않기로 했어.😅
잘 지내시죠 외계인님? 벌써 2월이 다 기울어 가네요. 오랜만에 댓글을 남깁니다. 늘 읽고 있는데, 댓글을 남길 맘의 여유가 없었어요ㅠㅠ
이 글 보고 카웨코.. 샀지뭐예요. 어제 받고 써봤는데, 정말 부드럽게 잘 써져서 좋아요. 묵직해서도 좋고. 이제 총 두 개의 만년필이 생겼습니다. 뭔가 제 자신에게 힘을 주고 싶을 때 만년필을 사야지 했는데, 그냥 되게 사고 싶을 때 사려고요(제발 좀 공부를 열심히 하기를...).
힘든 시절이지만, 마음도 몸도 늘 안녕하시길 바랍니다 외계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