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만년필 브랜드들이 제품의 주제나 컨셉을 콜렉션으로 만들어 물건을 팔지. 바로 떠오르는 곳은 ‘몽블랑’과 ‘오로라’인데, 몽블랑은 배우, 작가, 음악가, 문학작품 등 펜과 어울린만한 주제로 콜렉션을 내놓고 있고, 오로라는 문학은 물론이고 대륙, 행성, 바다, 자연환경 등을 주제로 만들고 있어.
그런 펜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컬러, 디자인, 소재 등을 조합해서 특정한 주제를 표현하려고 하지. 그런데, 설명 없이 몽블랑 작가 에디션 윌리암 셰익스피어 스페셜 에디션 만년필을 보고 셰익스피어와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또, 오로라의 이 펜을 보고 ‘열대’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오로라의 다른 한정판인 Stilografica와는 얼마나 비슷한가? 브랜드들은 이 커다란 간극을 그럴듯한 스토리텔링과 마케팅으로 메우고 있지.
만년필 애호가들은 이런 사실들을 모두 알면서도 지난 번의 다짐(이번이 마지막 만년필!)이 무색하게, 새 만년필을 계속 주문하고 있어. 왜냐? 그 작은 차이도 크게 느껴지고, 스토리텔링에 이미 몰입해 있으니까. 펜애딕트의 말처럼 “더 나쁜 중독들도 있어. 그렇지?”
그런데 이번에 구입한 ‘오노토 플랜더스 펜(Onoto The Flanders Pen)’은 주제를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차원이 달라. 주제를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는데,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전쟁
참전자인 캐나다 군의관 존 맥크레이 중령의 ‘플랜더스 들판에서(In Flanders Fields)’라는 시(더 많은 내용은 영문 위키피디아).
전쟁 당시 사용된 포탄 드라이빙 밴드(포신의 강선과 맞물려 포탄을 회전시키는 부위)의 구리
‘플랜더스 들판에서’가 쓰여진 벨기에 이프레스 에섹스 지역의 흙
금속공예 전문회사인 ‘TMB Art Metal’과의 협업
이 모든 요소들이 합쳐져 플랜더스 펜이 만들어진 거야. 펜의 배럴(몸통)에는 ‘플랜더스 들판에서’의 첫 두 행이 새겨져 있고, 포탄의 구리로는 양귀비꽃 모양의 캡 밴드(중결링)와 버튼(캡탑)을 만들었고, 그 지역의 흙은 붉은 에나멜과 섞어서 버튼 색을 만드는 데 썼다고 해. 시를 읽어봤는데, 전쟁의 슬픔과 비참함이 느껴졌어.
플랜더스 들판에서
플랜더즈 들판에 양귀비꽃 피었네,
줄줄이 서있는 십자가들 사이에.
그 십자가는 우리가 누운 곳 알려주기 위함.
그리고 하늘에는 종달새 힘차게 노래하며 날아오르건만
저 밑에 요란한 총소리 있어 그 노래 잘 들리지는 않네.
우리는 이제 운명을 달리한 자들.
며칠 전만 해도 살아서 새벽을 느꼈고 석양을 바라보았네.
사랑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였건만
지금 우리는 플랜더즈 들판에 이렇게 누워 있다네.
우리의 싸움과 우리의 적을 이어받으라.
힘이 빠져가는 내 손으로 그대 향해 던지는 이 횃불
이제 그대의 것이니 붙잡고 높이 들게나.
우리와의 신의를 그대 저버린다면
우리는 영영 잠들지 못하리,
비록 플랜더즈 들판에 양귀비꽃 자란다 하여도.
(출처: 위키백과)
만년필이라는 물건에 전쟁의 역사를 담기 위해 ‘시’라는 기억, ‘무기’의 일부, 전투 지역의 ‘흙’을 이용한 시도였고, 성공적이라고 생각해. 이 정도 스토리면 필감을 따지는 게 의미 있을까 싶지만 그 부분도 매우 만족스러워. 어차피 닙은 오노토 ‘햄릿’과 같은 7호 F촉을 쓰니까, 지난 주에 소개한 김덕래님의 글을 참고하면 될 것 같아. 이 펜이 도착하고는 이것만 쓰고 있는데, 계속 쓰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네.
언박싱 사진 몇 장 올려볼게.
내가 지금까지 산 만년필 중 가장 비싸지만, 좋은 선택이었다.
💁🏻링크들
다들 별고 없으시지요? (펜닥터D의 수리공작소)
10 Stationery Pairs That Were Made for Each Other (JetPens 유튜브)
NoteCards (Writer, interrupted.)
ㅋㅋㅋ 때깔이 좋구먼^^
365호에다가 선물드리고 싶어짐^^
뭘 드려야 할까???
오오... 지름 축하드립니다. ^^ 좋은 인생이란 이야기가 많은 것이라는 글귀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좋은 만년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순한 마케팅에서 출발한 다른 메이커의 한정판보다 뭔가 더 이야기가 담긴 만년필에 끌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