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싶은 잉크가 생길 때마다 모조리 살 수는 없으니 신중하게 고른 후 사는 편이야. 주문한 잉크가 오면 빨리 펜에 넣어 쓰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그런데 주로 쓰는 펜들은 정해져 있고, 이미 잉크가 차있는 상태가 대부분이지.
잉크를 거의 다 쓴 만년필이라고 하더라도 제대로 세척한 후에 쓰지 않으면 잉크가 섞여서 전혀 다른 색깔이 나온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어. 이전에는 블랙, 블루블랙 계열의 잉크를 주로 썼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밝은 주황, 녹색, 보라 계열의 잉크를 써보니 세척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더라고.
이번에 나름대로 만년필을 깨끗하게 세척 후 파이롯트 이로시주쿠 유야케(저녁노을) 잉크를 파이롯트 커스텀 823 앰버에 넣었는데 기대했던 화사한 주황색이 아니라 갈색에 가까운 색이 나오더라고. 직전에 쓴 블루블랙 잉크가 남아있었나봐. 할 수 없지 뭐. 지금 충전돼 있는 거 다 쓴 후에 같은 잉크를 다시 넣으면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갖는 수밖에.
이 일을 교훈 삼아 이제는 만년필 세척 도구를 이용해서 여러 번 세척하고, 두 시간 이상 물에 담가둔 후에 꺼내 말린 후 쓰고 있어. 그렇게 한 후 새 잉크를 충전했더니 잉크 본연의 색이 나오네.
잉크 충전 방식이 카트리지/컨버터인 만년필은 잉크 저장소를 분리할 수 있어서 도구를 이용해 쉽게 세척할 수 있는데, 펜 몸통 자체를 잉크 저장소로 쓰는 피스톤 필러, 플런저 필러 등의 만년필은 분해가 되지 않으니 깔끔한 세척이 쉽지 않아. 도구를 이용해 분해를 할 수도 있지만 아, 거기까지 가고 싶진 않다.
이런 방식의 펜들은 물에 좀 오래 담가 놓고 잉크가 물에 퍼져 나오는 상태를 보고 세척 상태를 판단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했을 때, 남아 있는 잉크가 실처럼 흘러 나오면서 퍼지는 모습도 볼 수 있는데, 좀 예뻐. 나중에 사진으로 올려볼게.
그리고, 이렇게 여러 잉크를 쓰다보면 어느 만년필에 어떤 잉크가 들어있는지 잊어버릴 때가 많아서 방법을 하나 생각해 냈지. 잉크 충전 로그라고 할 수 있는데, 거창한 것 아니고 그냥 다이어리에 어떤 펜에 어떤 잉크를 넣었는지 써두는 거야. 디지털 다이어리인 데이원(Day One)에 기록하고 있어.
지금 잉크가 들어가 있는데 안 쓰고 있는 펜들이 꽤 있어서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대세척’을 해야 할 것 같네. 펜애딕트에 올라온 글을 보니 사진만 봐도 힘들어 보이는군. 닙까지 분리하고 싶진 않고, 잉크만 깨끗이 빼내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링크들
Thoughts on handwriting (Uk Fountain Pens) 손글씨에 대한 단상.
Note-making (Writer, interrupted.) 이 분도 옵시디언을 쓰네.
Kool Moe Dee did a rapper report card in the late 90s (@nnatewrites) 이렇게 해두면 학생들이 이의 제기해도 근거가 확실해서 문제가 없겠네.
1700 Inks! (Mountain Of Ink) 잉크 1,700종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니 정말 대단!
The 41 Best Pens for 2022: Gel, Ballpoint, Rollerball, and Fountain Pens (JetPens)
10 Korean Pens We LOVE (JetPens) 한국 펜들까지 다루다니 취재력이 대단하네.
Why I Love Natural (Undyed) Leather And Why You Shouldn't Worry If It Gets Dirty (The Gentleman Stationer) 나도 염색한 가죽보다는 이 편을 더 좋아해. 직접 에이징하면서 변해가는 색도 예쁘고, 예상치 못한 사고(!)때문에 생긴 얼룩으로 추억이 들러 붙는 것 같기도 하고. 단, 결벽증이나 완벽주의 비슷한 것이라도 있는 분들에게는 추천하기 힘듦.
언젠가 서울외계인님이 쓰고계신 만년필을 가격대 또는 품질 별로 제안해주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아니면 만년필 하나별로 그에 담긴 추억을 설명해주시는 콘텐츠도 좋겠네요^^
저도 관장을 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