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 뉴스레터 그 두 번째 편이야. 지난주에는 ‘모두의 도구’라는 제목으로 보냈었는데, 생각해보니 설명 필요 없이 직관적인 이름이 더 좋을 것 같아서 ‘주간 〈문구文具〉’로 바꿨어(혹시나 ‘文句’로 아는 사람이 있을까봐 한자까지). 별로면 나중에 또 바꾸지 뭐.
만년필이 워낙 많고 각자의 취향도 다양하지만 만년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좋은 펜이라고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있는 펜들이 있어. 그 중에는 파이롯트의 커스텀 시리즈 몇 개가 있는데 이번에 743 모델의 FA닙을 샀어. 이 펜에 대한 설명은 이정현이란 분이 쓴 아주 좋은 글이 있어서 그걸로 대신하면 될 것 같아. 원래는 같은 모델의 M닙을 살까하다가 이 글을 보고 FA닙으로 결정했는데, 플렉스 닙이긴 하지만 역시 가늘게 나오네. 요즘은 굵게 나오는 닙을 선호하다보니 그 부분이 썩 만족스럽진 않지만 확실히 필감이 독특한 펜이야. 비슷한 연성인 플래티넘 센츄리 SF닙도 가지고 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네. 가늘게 나오는 닙이니 흐름이 좋은 잉크를 넣어야 할 것 같고, 일단 많은 양의 노트 필기보다는 다이어리, 메모 등에 우선 활용해 보려고 해.
펜의 관심 범위를 캘리그래피까지 넓히면 또 다른 세상의 펜들이 눈이 보이는데 그 중 하나가 세일러 후데(fude, 붓) 만년필이야. 붓으로 쓰는 느낌을 구현하기 위한 만년필인데, 닙의 끝부분이 40도 또는 55도로 꺾여있어. 그래서 펜을 쓰는 각도에 따라 글씨의 굵기가 변하게 되지. 다양한 굵기의 글씨를 요리조리 쓸 수 있다보니 재밌더라고. 노트 필기용으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제목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아. 잉크도 붓펜 같이 전용 잉크가 아니라 규격에 맞는 카트리지나 컨버터에 일반 잉크를 넣어서 쓰면 돼.
다음 펜 역시 캘리그라피용인데, 나는 캘리그라피가 하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예쁘고 보기 좋은 글씨를 쓰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 하나 더 더하자면 빨리 쓰기까지. 이 펜은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까마귀 부리 모양이라고 해서 오구펜, 또는 제도할 때 먹줄 긋는 용으로 쓴다고 해서 먹줄펜, 룰링(ruling)펜이라고 해. 글씨를 쓰기 위해서 산 건 아니고 잉크 색깔을 비교하기 위한 견본(swatch)을 만들 때 선을 굵게 긋기 위해서 산 거야.
잉크 매니아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인스타그램 태그 중 하나가 #inkswatches인데, 다양한 잉크들을 다양한 아이디어로 표현하고 있더라. 이런 책도 비슷한 취미활동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 같은데, 잉크로 색깔을 표현하고 구성하면서 즐거움들을 느끼는 것 같아. 구독중인 블로그 ‘The Well-Appointed Desk’의 이런 글과 사진을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도 들고.
Marionbcn의 선물은 매달 어김없이 도착하고 있는데, 이번 달은 연말이라 그런지 조금 늦게 왔네. 테마는 역시 지난달에 이어 크리스마스인 것 같아.
Marionbcn의 Patreon 후원 현황을 보니 92명의 후원자를 통해 월 1,182달러를 후원 받고 있다고 나오는데, 예상보다 큰 금액은 아니지만 항상 즐겁게 만들어서 보내고 있더라고. 직접 제작한 문구도 판매하고 있으니 후원과 서로 연결되는 효과도 있을 것 같네.
우연히 《펜홀릭: 헤어나올 수 없는 필기구의 매력》이란 책을 발견했는데 절판되었더라고. 그런데 중고로 많이 팔고 있어서 금방 구했어. 목차를 보면 알겠지만, 저자가 시각 디자인을 전공해서 그림의 영역까지 포함해 세상에 나와있는 거의 모든 펜을 다루고 있어. 후데 만년필도 이 책에서 알게 됐지.
책 소개 사진들을 보면 알겠지만, 잘 찍은 필기구 사진들이 페이지마다 꽉꽉 차있어서 보는 재미가 아주 좋아. 너무 많은 필기구를 다루다보면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지나가기 쉬운데, 이 책은 각 필기구의 핵심을 글과 사진으로 잘 보여주고 있어. 저자의 실력이 발휘되는 거겠지. 지금까지 본 국내 문구 관련 책 중에서 제일 잘 만들어진 것 같아. 이 좋은 책이 왜 절판됐는지, 아쉽네.
주간 〈문구文具〉 제2호는 이렇게 마무리할게. 문구와 관련해 다루어 줬으면 하는 내용이 있으면 댓글이나 이메일로 알려주세요.
이제 올해는 한 주 남았네. 날도 춥고 어수선한데,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땐 조용히 글씨를 써보는 걸 추천해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