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디자인철학》 · 통독
《디자인철학》은 질문이 많은 책이다. 그만큼 ‘디자인’은 정의하기가 어려운 개념이다. 아니, 개념 정의로만 끝나지 않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디자인 이론이 아닌 디자인 철학을 정립하기 위한 시도이다.
이론과 철학은 중첩되는 게 있기는 해도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대략 그 차이는 이렇다. 철학과는 달리 디자인 이론의 주된 동기와 초점은 디자인 실천이다. 철학의 질문들과는 달리 이론이 제기하는 질문들을 추동하고 프레임 잡는 것은 현재의 실천적 고려들이다. 그렇다고 이론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것은 절대 아니다 — 실제로 실천하는 디자이너에게는 철학보다 이론이 훨씬 더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디자인에 대한 현재의 이론적 저술들은 가령 “예술철학”이라고 말할 때와 같은 의미에서 “디자인철학”이라고 부를 수 없다. (pp.11-12.)
그럼 여기서 의미하는 철학은 어떤 철학인가?
두 종류의 철학이 있다. 하나는 철학 전통 및 그 전통의 가장 위대한 정신들의 잘 다져진 길을 따르며, “정신이란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앎이란 무엇인가?” 같은 영원한 질문들을 집어 든다. 다른 하나는 이 확립된 길에서 빠져나와 더 넓은 영토로 들어가며, 지금까지 탐사되지 않은 어떤 주제에 철학적 접근법을 적용한다. 지금까지 디자인에 초점을 맞춘 철학 분야는 없었으니까 이 책은 뒤의 범주에 든다. (p.11.)
저자인 글렌 파슨스는 이 시도를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
디자인철학을 위한 지형을 스케치할 것이고, 디자인의 관심사들이 철학자를 사로잡는 근본적 질문들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운 좋게도 이는 실제보다 훨씬 더 야심 찬 말로 들린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디자인철학’이라 불리는 탐구 영역이 따로 없기는 하지만, 미학, 윤리학, 인식론, 형이상학, 기술철학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수고하고 있는 철학자들이 해놓은 직접적으로 디자인을 다루거나 여하간 디자인과 관련이 있는 탁월한 철학적 작업이 풍부하게 있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이 책은 이 작업을 한데 모아서 체계적으로 취급하려고 한다. 둘째, 우리는 그와 같은 체계적인 취급을 위한 쓸 만한 본보기를 가지고 있다. 모더니즘 운동이 우리에게 남겨준 본보기. (pp.12-13.)
애초 이 책을 집어들게 된 이유는 ‘디자인’이라는 단어의 종잡을 수 없는 사용 사례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주로 시각적인 작업에 한정해 ‘디자인’을 사용하는 것으로 ‘느끼고’ 있으나, 가령 ‘디자인 씽킹’이라는 방법론에 부딪히면 잠시 혼란이 생긴다. 또 해외에서 수입된 각종 디지털 관련 직군들 — 프로덕트 디자이너, 경험 디자이너 등 — 도 마찬가지로 혼란스럽다. 실제 업무 현장에서 디자이너들에게 원하는 것은, 단순화해 말하면 ’포토샵’으로 만든 시각적 결과물이다. 게다가 혼란을 더 하는 것은 그 이상을 원할 때도 있고 그 이하를 원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 이 디자인, 디자이너라는 개념과 그에 제대로 부합하는 활동이 뭔지 항상 의문이었다.
저자는 쉽게 답을 손에 쥐어주지 않는다. 그럴듯한 이론을 소개하고는 곧 그에 대한 반대 이론을 제시하며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간다. 마치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주인공으로 생각했던 등장인물들이 예고도 없이 허망하게 죽어나가는 걸 지켜보는 느낌이랄까.
죽은 줄 알았던 등장인물이 살아나듯 모더니즘만은 결말까지 등장한다. 저자의 의도대로 굉장히 넓은 디자인 관련 논의를 탐색하고 해답을 찾기 위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철학적 입장으로서의 모더니즘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합리적 디자인 개념을 지지했다. 첫째, 모더니즘은 디자인의 핵심 기준 중 몇 가지 — 기능적, 상징적, 매개적 기준 — 에 대한 재해석을 제공했으며, 이 기준들에 대한 어떤 다른 해석들을 무관한 것으로 거부했다. 둘째, 모더니즘은 이 기준들 사이의 중요한 연결들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이 기준들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디자이너의 노력을 수월하게 해줄 연결들. 모더니즘적 생각이 디자인 문제를 재개념화했던 이 두 가지 방법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우선 디자인에서 모더니즘 운동의 기원과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 유용하다. (p.77.)
통독을 통해 전체적인 내용은 파악했으나 아직 ‘디자인철학’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내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평소 ‘디자인’에 관해 가졌던, 적극적 의식 아래 가라앉아 있던 많은 의문들에 대한 검토들이 있다는 것이 만족스럽다. 이후 정독을 통해 좀더 선명한 정리를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