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친구와 오랜만에 만났어. 함께 다녔던 회사 옆에 있는, 자주 가던 고깃집에 갔는데 항상 사람이 많은 곳이라 40분 정도를 기다리다 자리에 앉았네. 맛있는 모서리살과 된장찌개를 먹고 평소에는 느끼지 못한 포만감을 안고 헤어지는데, 친구가 선물 받은 거라며 작은 잔을 하나 줬어. 집에서는 무알콜 맥주 외에는 술을 잘 안 마시니까 안 받으려고 하다가 모양을 본 순간 ‘엇 이거 잉크웰(잉크를 담아 두는 작은 단지, 병 같은 것)로 쓰면 딱이겠는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가끔 딥펜(dip pen)으로 재미 삼아 글씨를 써보며 손을 풀어 보는데 그때마다 작은 잉크웰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던.
다 쓴 잉크병을 활용해도 되지만 대부분이 너무 깊고 커서 잉크를 조금씩 덜어서 쓰기는 마땅치 않더라고. 자주 쓰는 게 아니니까 돈 주고 사기는 아깝고, 그렇다고 품위 없이 소주잔 같은 걸 쓸 수는 없잖아. 그런데 친구가 준 잔은 울릉도 모양을 본떠 만들었고 금테도 둘렀어.
이렇게 딥펜에 잉크를 묻혀서 쓰면 되는 것. 내가 중학교 때만 해도 교무실에 가면 선생님들이 딥펜으로 생활기록부 같은 문서를 작성하는 걸 보곤 했었어(짚신은 신지 않았다). 학생 중에서도 종종 이걸 시도했다가 그 불편함에 곧 모나미 153으로 돌아가곤 했지.
펜촉은 워낙 다양해. 사진에 나온 펜촉은 Steno 닙(펜촉)인데, 힘 조절을 하면서 굵기를 다르게 쓸 수 있어. 세게 눌러 쓰면 굵게 써지는 식이지.
이 딥펜을 몇 번 써보면 만년필이라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훌륭한 필기구인지 알게 되지. 그런데 잉크 중에는 만년필에 넣어서 쓰기는 곤란한 것들이 있어. sheen 계열은 글씨를 쓴 후에 건조되면서 테와 광택이 생기는 잉크이고, shimmer 계열은 펄이 들어가 있어서 반짝이는 잉크야. 이런 잉크들을 만년필에 넣어 쓰면 잉크 흐르는 길이 막혀버리거나 하는 불상사가 생겨서 딥펜으로 쓰는 것이 안전해. 그래서 이런 잉크들은 일상적인 필기용이라기보다는 드로잉이나 캘리그라피를 할 때 주로 쓰는 것 같아(잉크 종합선물세트. 광고 아님. 🤑내가 샀을 뿐).
안녕하세요 서울외계인님. 계속 몰래 읽고 있었는데 댓글은 처음 남기네요. 저는 문구를 많이 좋아하지만 적극 구매는 못하고 있다가.. 이제 만년필을 사보려고 해요. 예전 플랫폼의 글에서 자녀분에게 카웨코 만년필 사주신 글을 읽었는데.. 그걸로 시작해볼까 생각 중 입니다. 카웨코 70's(?) 외에 입문자에게 또 추천해 주실만한 펜이 있을까요? 업무하실 때 쓰는 만년필과 공부하실 때 쓰는 만년필이 다른지도 궁금합니다.
늘 좋은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해요.
그러고 보니 가배나루 커피 한 잔 때리는 걸 빼먹었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