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사소한 장기 기억 하나
🧠뇌에 왜 지금까지 장기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을까 싶은 기억들이 있다. 하찮다는 것이 아니다. 너무 구체적으로 기억되서라는 편이 맞다. 그 중 하나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내 짝에 대한 기억이다. 지금 이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있기도 하다.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경수'라고 하자.
경수는 일찌감치 대학 진로를 📸사진학과로 결정했다. 그리고는 사진기를 항상 가지고 다니며 학교에서도 사진을 찍었다. 내가 중학교 때 아버지가 펜탁스 SLR 카메라를 사신 덕에 나도 사진에 관심이 있었고, 중학교 수학여행 때 친구들 사진을 찍어주며 🎞필름 수십 통을 쓴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3 아들에게 고가의 카메라를 내어주신 아버지가 존경스럽다.)
그런데 경수의 카메라는 렌즈가 짧았다. 물어보니 보통의 50mm 표준렌즈가 아니라 광각렌즈라고 했다. 24mm였나. 광각으로 찍는 이유는 피사체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래야 사진 실력이 는다고. 나도 지금 사진을 찍을 때 광각을 선호하는데 아무래도 경수의 영향 같다.
경수는 인물사진을 찍을 때 정수리 부분을 살짝 프레임 밖으로 잘라서 찍었다. 같은 반 친구 아버지가 사진관을 하셨는데 그 친구가 사진학과 지망생이라며 경수의 사진을 아버지에게 보여드렸었나보다. 친구 아버지는 사람 머리를 자르면 어떡하냐고, 사진을 잘 못 찍는 것 같다고 하셨단다.
경수는 그 얘기를 듣고 그렇게 찍는 이유를 설명했는데, 아버님 말씀도 맞지만 그렇게 살짝 머리 윗부분을 자르면 사람의 얼굴에 더 집중하게 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그 친구가 아버지에게 그 말을 전하고나서 한참 뒤에, 우리 아버지도 요즘 인물사진을 그렇게 찍고 계신다고 전해왔다. 나도 인물사진을 가까이서 찍을 때 정수리를 살짝 잘라서 찍는다. 역시 경수의 영향 같다.
경수는 원하던 대로 국내 최고의 사진학과에 입학했고, 나는 같은 학교의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해 입학식에서 만났다. 서로 캠퍼스가 달라 만나지는 못했고, 1학년 때 경수의 친구들과 우연히 교문 앞에서 만나 잠시 놀다 헤어졌다. 그 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전화 통화만 했고, 인터넷으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 있다. 여전히 사진 관련 일을 하며 잘 살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