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읽기 《감시 자본주의 시대》 (11)
II. 누가 아는가?
‘일은 잘한다’는 말은 예전처럼 원재료와 설비를 다루는 실질적인 작업을 잘하다는 뜻이 아니라, 화면에 뜬 데이터를 확인할 줄 알며, 그 전자 텍스트를 이해하고, 그것으로부터 배우며, 그것을 통해 행위하는 기법을 잘 습득하게 됐음을 뜻하게 됨. 당시에는 신기한 일.
이 가시적 변화가 심층적이고 중대한 변동의 신호임. 작업자의 질서를 만드는 원칙이 노동의 분업화에서 학습의 분업화로 이동함. 이 성취에 뒤따른 쓰라린 갈등, 요컨대 지식, 권한, 권력의 딜레마가 있음.
학습의 분업화를 탐구하려면, 세 개의 핵심적 질문으로 표현되는 이 딜레마를 풀어야 함.
‘누가 아는가?’ — 이것은 지식의 분배에 관한 질문임. 학습 기회에서 누구를 포함하고 누구를 배제하는가?
‘누가 결정하는가?’ — 권한에 관한 질문임. 누구를 학습에 포함시킬지, 그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그들이 얼마나 자신의 지식에 기반하여 행동할 수 있게 할지를 어떤 사람, 어떤 기관, 어떤 절차가 결정하는가? 그 권한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누가 결정하는지를 누가 결정하는가?’ — 이것은 권력에 대한 질문임. 지식을 공유하거나 공유하지 않을 권한을 뒷받침하는 권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결과는 월가의 청중을 의식한 비용 절감형 사업 모델로, 미국 노동자의 디지털 기술과 역량에 투자하기보다는 일자리의 자동화 및 수출을 강조하는 것이었음.
‘누가 아는가?’에 대한 답은 기계, 그리고 분석 도구를 휘두르며 정보로부터 가치를 파악하고 추출하는 소수의 엘리트.
‘누가 결정하는가?’에 대한 답은 협소한 시장 형태와 사업 모형.
‘누가 결정하는지를 누가 결정하는가?’ 유의미한 운동이 없다면 주주 가치 극대화라는 규율에 묶인 금융자본이 부전승을 거두게 될 것임.
"미국 기업들이 기계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투자했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대부분의 기업들은 똑똑한 사람들보다 똑똑한 기계를 선택함. 이러한 경향은 일부 고숙련 일자리와 나머지 저숙련 일자리만 남고, 과거 ‘중간에’ 있던 일자리의 대부분은 자동화로 대체되는 현상을 야기함. ‘일자리 양극화’.
북유럽과 유럽 대륙의 국가들에서는 고품질의 혁신적 상품 및 서비스에 투자하는 만큼 더 포용적인 학습 분업화를 위해 직원 교육에도 상당한 투자를 함으로써 일자리 양극화를 완화함.
중요한 점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이 갈등의 두 번째 단계에 와 있다는 것임. 더 넓게 보면 사회 전체에서의 학습 분업화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새로운 투쟁의 시작일 뿐임. 사람들, 각종 프로세스들, 사물들이 정보로 재탄생함에 따라, 학습의 분업화는 우리 시대 사회 질서를 지배하는 원리가 됨.
III. 감시 자본과 이중 텍스트
현 시대와 19세기 말~20세기 초 시기의 중요한 공통점이 있음. 그 시기는 노동의 분업화가 산업사회 초기였던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사회 조직의 첫 번째 원리로 처음 출현한 때임. 이 경험은 지침을 제공할 수도 있으며 어떤 위협이 있는지 경고해 줄 수도 있음.
뒤르켐, 《사회분업론The Division of Labor in Society》.
그때까지 분업이란 작업의 전문화를 통해 노동 생산성을 달성하는 결정적 수단이라고만 이해되었음. 뒤르켐은 이미 그의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던 사회적 변화에 주목함. 그는 ‘전문화’가 정치, 행정, 사법, 과학, 예술에서 ‘영향력’을 얻고 있음을 관찰함. 그의 결론은 노동의 분업화가 산업사회를 조직하는 핵심 원리가 되었다는 것임.
그런데, 사회 전체에서 노동 분업화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뒤르켐은 현대 산업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을 더 넓은 시각에서의 연대 속에서 연결시키는 상호의존성과 호혜 관계가 분업화로 설명된다고 논증함. 호혜적인 관계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하고 서로의 일에 관여하게 하며 서로 존중하게 하는데, 이 모두는 새로운 질서 원리에 도덕성을 불어넣음.
분업의 결과는 건겅한 현대적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고 유지하는 질서의 원리였음. “분업은 독특한 사회적·도덕적 질서를 확립한다는 면에서 순수한 경제적 이해 관계를 훨씬 넘어선다.” (뒤르켐)
뒤르켐은 사회적 불평등이 사회적 노동 분업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을 지적함. 특히 그는 ‘싸울 권리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갈등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권력의 극단적 비대칭을 가장 위험한 불평등 형태라고 봄.
과거에 노동 분업이 이동한 경로를 따라 학습의 분업화도 경제 부문에서 사회 전체로 이동함. 그것이 우리의 사회 질서와 도덕의 기초를 확립한다는 점에서 “순수하게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훨씬 넘어선다”.
감시 자본주의는 이중 텍스트 문제라고 부르는 현상과 함께 학습의 사회적 분업을 명령하기 시작함. 감시 자본주의의 특정 메커니즘 때문에 하나가 아닌 두 개의 ‘전자 텍스트’가 생산될 수밖에 없음.
1차 텍스트에서 우리는 저자이자 독자임. 그러나 감시 자본주의 체제에서 1차 텍스트는 홀로 서 있지 않고 바로 뒤에 그림자를 끌고 다님. 우리가 1차 텍스트에 입력하는 모든 것은 아무리 사소하고 순식간에 지나치는 것일지라도 잉여 추출의 표적이 됨. 그 잉여가 2차 텍스트의 페이지들을 채움. 2차 텍스트는 우리가 볼 수 없도록 감추어져 있으며 오직 감시 자본가들만 읽을 수 있는 ‘읽기 전용’ 텍스트임. 이 텍스트에서 우리의 경험은 축적하고 분석해야 할 원재료로 전락함.
“구글플렉스Googleplex에서의 의사결정은 닫힌 문 뒤에서 이루어진다. … 그들은 우리에게 세계를 ‘보여주기’만 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세계를 창조하는데 기여한다.” 2차 텍스트는 우리의 인식 바깥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창조되고, 유지되고, 활용됨. 그 결과 학습의 분업화는 정보 문명 시대에 사회 질서를 지배하는 원리일 뿐만 아니라 감시 자본주의의 볼모가 됨.
IV. 새로운 사제들
구글의 가공할 만한 지배력의 심장부에 있는 기계 지능은 “80퍼센트 인프라”라고 불리는데, 이 시스템은 15개소에 설치한 창고 크기의 맞춤형 데이터센터, 그리고 2016년 추정치에 따르면 4개 대륙에 있는 약 250만 대의 서버로 구성됨. 기계학습에서 지능은 훈련에 사용되는 데이터의 양에 비례함. ’풀스택 AI 회사’.
사회 전체의 학습 분업화가 사적 부문에 고용된 소수의 21세기형 사제들, 즉 전산 전문가와 그들이 사적으로 소유한 기계, 그리고 그들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의해 장악되면서 병리적 현상으로 변해감.
V. 사회적 학습 분업화와 사유화
30년 전, 법률학자 스피로스 시미티스Spiros Simitis, “개인 정보가 행동의 기준을 부과하는 데 이용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진다. 따라서 정보 처리는 교묘하게 개인 행위를 형성하고 조정하는 전략의 필수 요소로 진화하고 있다.” 시미티스는 이러한 경향이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뿐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와 양립불가능하다고 주장함. 개인이 자율적인 도덕적 판단과 자기결정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만 민주주의가 가능하기 때문임.
문제는 감시 자본주의가 뼛속 깊이 반민주적이지만 그 괄목할만한 함이 국가에서 기원하지 않는다는 점임. 그것은 내적 일관성을 갖춘 축적 논리가 성공적으로 가동됨에 따라 나타나는 일관되고 예측 가능한 귀결임.
감시 자본주의는 상대적으로 무법성이 큰 국가인 미국에서 먼저 지배적인 위치를 얻은 후 유럽으로 확산되었고, 전 세계 곳곳을 잠식해가고 있음.
앎의 주체는 감시 자본 기업들이고, 결정하는 주체는 감시 자본주의 형태의 시장이며, 누가 결정하는지를 결정하는 주체는 감시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적 투쟁이다.
VI. 소결: 전례 없음의 힘
21세기에는 감시 자본이 우리 사회 전체, 결국 구성원 개개인과 대립함. ‘공급 측면’에서 감시 자본가들은 그들에게 디지털 세계라는 무방비의 미개척지에 대한 권한과 정당성이 있다고 선언했는데, 이 선언이 바로 그들이 솜씨 좋게 활용한 무기였음.
싸움이 필요하다면 자본주의를 상대로 하는 싸움이 되게 하자. 감시 자본주의가 사회에 위협인 만큼 자본주의 자체에도 위협이라고 주장하자.
감시 자본주의는 사회에 의존하므로 집단적인 사회 행동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만 3차 현대성에 걸맞는 정보 자본주의의 더 큰 약속을 회복할 수 있음.
2부에서는 인간 행동의 예측에 의해 규정되는 이 두 번째 경제성 요청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독자들이 잊고 살았던 경악이라는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게 할 것임.
미래 시제에 대한 권리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거나 우리의 행동을 수정하거나 제약하는 불법적인 외부 세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권리를 말함.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삶에 침입하고 우리의 삶을 기형화하는 일에 점점 무감각해짐. 우리는 불가피한 일이라는 선전에 승복하지만, 불가피한 일이란 없음. 우리는 경악이라는 감정을 잃어버렸지만, 되살릴 수 있음.